아마 이 책을 나는 이십대에 처음으로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다시 읽는 내용은 마치 처음으로 읽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분명 올드하거나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설정들이 있다. 그럼에도 그 시대로부터 지금 얼마나 진보했는지 확신할 수가 없을 정도로 여전히 시의성을 가진 작품임에 분명하다. 무책임한 알콜 중독자 아버지, 실질적인 가장으로서의 억척스러운 어머니, 그 어머니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쌍둥이 이모. 이십대 중반의 여주인공 안진진은 자신에게 안락한 삶을 제공할 것으로 보이는 남자와 자신의 아버지와 닮은 면을 지녔기에 또 다른 고달픈 삶을 예고하는 듯한 남자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는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양귀자 <모순>  작가노트


모든 인간은 모순적이다. 그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필연적 모순성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안진진의 선택이 가지는 양면성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어머니와 이모가 쌍둥이로 삶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설정 또한 이 모순의 형상화의 일환일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전부를 그 이면의 삶을 판단하거나 심판할 수 없다. 그 복잡미묘하고 모순적인 내면은 타인들의 일면적인 해석으로 함부로 요약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하는 선택과 나의 언행과 나의 삶은 일치하기를 바라지만 그 또한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게 생명의 모순이니까.
















<모순>이 너무 좋아서 양귀자의 작품들을 찾아 읽게 됐다. 세월이 한참 지났음에도 여전히 어떤 파격을 지닌 작품이다. 역시 이십대의 여성이 주인공이고 그녀가 유명 남자 배우를 납치하고 세상에 선포하는 자기 선언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극단주의적이고 노골적으로 보인다. 다만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의 여성의 소외에 대한 발언은 여전히 울림을 가진다. 다른 단점들이나 한계를 뚫고 이 작품이 가지는 무게는 거기에서 나온다. 언제나 소극적이었던 여성 인물들, 삶과 사회와 남자에 순종적이거나 타협했던 캐릭터를 정면에서 부수어 버리는 그 시원하고 극적인 주인공의 모습은 분명 어떤 쾌감을 준다. 주인공이 남성적 폭력에 또 다른 형태의 폭력으로 대응한 점과 경제적 약자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착취의 당사자가 된 것은 이야기의 모순으로 지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대를 뛰어넘는 두드러지는 장점이 빛나는 이야기다. 
















제목만으로도 예견이 되는 이야기다. 여기 이곳에서도 두 늙은 여자가 가질 인상과 무게는 어떤 한계와 편견 안에 갇힌다. 하물며 극한의 알래스카에서 부족들이 두 늙은 여자를 버린 것은 그리고 그 두 여자가 생존해 나가는 것은 어떠한가. 살라고 버린 것이 아니고 존중해서 헤어진 것이 아닌 것임을 알고 시작하는 살아내기는 고통의 여정 그 자체다. 인간에 대해 실망하고 자신들이 과연 살아남을 가치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은 처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생존하고 부족들은 그들에게 돌아간다. 이 아이러니한 결말은 우리가 이 시대에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뒤집는다. 반드시 쓸모 있어야 하고 젊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그 당연한 불편한 명제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전제로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그 틈바구니에서 소외되는 자들의 존귀함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시대에서 읽혀야 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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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3-17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닿는 내용 가득해서 이 글도 너무 좋고 양귀자의 모순도 관심있던 책인데 꼭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blanca 2022-03-17 14:11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또 다른 차원에서 해석되는 것들이 많더라고요. 일단 아주 재미있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간답니다.

페크pek0501 2022-03-17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순>을 오래전 읽었어요. 흡인력 있던 책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소망한다~>도 읽었어요. 양귀자 님은 그 시절엔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것 같아요.
남자 영화배우를 납치해서 가두고 연극을 하게 하는 게 둘 중 어떤 소설인가요? 이게 기억에 남아요.
그때 소설 속 영화배우가 안성기, 를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죠.
그 소문을 들어서인지 읽는 내내 안성기로 생각하고 소설을 읽었었죠. ^^
옛 소설을 다시 찾아 읽어 보고 싶네요. ^^

blanca 2022-03-17 19:00   좋아요 1 | URL
아, 페크님 말씀하신 건 <나는 소망한다 내가 금지된 것을> 이에요. 아, 안성기였어요? ^^;; 누군가 모델이 있을 것 같다는 심증은 갔지만 안성기인지는 몰랐어요.

페크pek0501 2022-03-18 09:33   좋아요 1 | URL
그 책이 나올 당시 남자 영화배우 톱스타는 안성기 님이 1위였거든요.ㅋㅋ

라로 2022-03-18 15:08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이 인용하신 글은 페크님의 칼럼 내용과 비슷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