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묘한 게 책 선택도 어떤 흐름 같은 게 있어서 한동안은 고르는 책마다 잘 읽히고 좋은 내용이 많은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시기는 고르는 책마다 그만 읽고 싶어지는 경우가 있다. 지금은 후자다. 벌써 두 권째 실패 중이라 곁에는 지금 읽는 책이 없는 상태. 이럴 때 새 책을 장바구니에 담는 일은 심한 죄책감을 동반하는 일이다. 이상한 강박인데 아무리 재미없고 흥미 안 가는 책이라 해도 일단 돈 주고 사면 끝가지 다 읽어야 한다는 아주 지독하고 자학스러운 독서관이 있다.--;;
새로 나온 책들은 어찌나 상큼한지... 가상으로 장바구니를 꾸려봐야겠다.
편혜영의 작품을 다 읽은 것은 아니라 그녀를 전반적으로 평가하거나 깊이 있게 분석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여하튼 그녀의 그 서슬 퍼런 문장이 좋다. 길게 중언부언하지 않으며 서사를 끌고 가는 힘이 돋보이는 작가. 일단 서사의 진폭과 심리 묘사의 결이 아주 잘 어우러져 가독성이 높은 작가다. 지루하거나 어려운 글은 그녀와 멀다. 기대되는 이야기. 어서 읽어보고 싶다. 양지로 가서 해바라기를 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인간의 내면 저 깊이까지 내려가 만지는 실재의 무게를 실감하게 해주는 진지한 작가의 글이 매력적이다.
제목에 끌린다. 젊은 여자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경우는 많지만 늙은 여자는 배경으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미 젊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늙기 위해 공부를 좀 해야 한다. (공부가 가능한 영역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에 자꾸 끌린다. 아이를 키우는 게 개인적인 육아관보다 그 아이를 키우는 문화권의 영향을 엄청나게 많이 받는다는 것을 순간순간 절감한다. 이 문화권에서는 용인되는 아이의 행동이 저 문화권에서는 무례하게 받아들여져 훈육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분명 그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을 때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이러한 다른 양육 태도는 적잖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타인에게 피해 안 가는 것이 중요한 곳이 있고 (기본적인 도덕률이기도 하지만) 아이의 자율성(참, 이것의 경계 만큼 모호하고 자의적인 것이 없다.)이 무조건 최고인 곳도 있다. 여하튼 궁금하다.
작은 아이의 영어 이름이 올리버인데 어떤 아이가 자기 올리버 안다고 이 올리버 아니냐고. 사실 개인적으로 올리버 색스 작가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마음에 좀 무리수를 둔 작명이긴 했지만 나는 정작 <올리버 트위스트>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는 발견을 했다. 찰스 디킨스는 의외로 지루하거나 읽기 어려운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문장도 쉽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도 있어 대체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 많다. 제대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어보고 싶다.
하지만 기다려야 하느니라... 이게 삼십 대와 사십 대의 차이인가 싶기도 하다. 삼십 대에는 책상에 새 책을 가득 쌓아놓고 냄새 맡고 어루만지며 뿌듯해했다면 이제는 자꾸 공간과 비용과 이런것 저런것을 저울질하고 계산하고 머뭇거리게 된다. 서글프기도 하고 타협하게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