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레나
한지혜 지음 / 새움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 제목을 정하기는 참 힘들다. 숙고 끝에 나는 "기록되는 삶"이라고 쓰기로 한다. 이 말이 아마도 이 신예 작가의 첫 단편집을 읽은 나의 소감을 가장 잘 요약하는 듯 싶어서. 

이 책에 담긴 열 편의 단편이 다 한결같이 만족스럽고 맘에 쏙 들었다고 하면 필시 거짓말일 터이지만, 나는  삼십이 조금 넘은 그러니까 뜨겁고 요란한 젊음의 터널을 막 지난 (그러나 여전히 아직 젊은) 작가가, 자신의 첫 단편집에서 이미 우리 일상의 다양한 부분을 골고루 건드린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 일상이란 조금 지루하고, 조금 신산스럽고, 조금 희한하고, 조금 우습고, 그리고 조금은 쓸쓸한 것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별스러울 것 없는 소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별스러울 것 없음이 바로 이 단편집에 진실의 힘을 불어넣어주는 듯 하다.

물론 몇몇 소재는 꽤 산뜻한 반면(호출),  어느 것은 조금 진부하다 (안녕 레나/ 자전거 타는 여자). 단편의 구성도 몇몇은 인상적이며 흥미롭지만 (목포행 완행열차/ 햇빛 밝은), 어느 것은 주제가 뭐야 싶게 헛갈리기도 한다.(한마을과 두갈래 길을 지나는 방법에 대하여) 그러나, 이 책이 작가의 첫 단편집인만큼 나는 이 작가에 대한 성급한 비평보다는 즐거운 기대를 품기로 한다.

책 말미에 평론을 단 이명원은 이 단편집에서 저자가 실업청춘시대의 군상을 잘 그려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목포행 완행열차"의 한 장면이 이 작가의 잠재력을 더 잘 드러내는 것 같았다.  

"우리 엄마 그 허연 몸뚱이가 길 속으로 우어우어 울면서 뛰어가는데, 엉덩이도 동그랗고 젖통아리도 동그랗고 그 동글동글한 몽치들이 공처럼 사방으로 튀는데, 창피해서 막 울면서 쫓아가다가도 어떨 때는 그 하얀 몸뚱이를 보면 가슴 한켠이 서늘하니 쿵 내려앉아." ("목포행 완행열차" 중에서)

단번에 독자의 마음과 눈을 동시에 사로잡는 이 장면은 상황을 소설 속으로 강렬하게 극화해내는 작가의 힘을 보여준다. "햇빛 밝은"에서 교미하던 사마귀가 자동차에 뭉개지는 장면도 이와 유사하게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집은 독자들에게 또다른 어떤 즐거움을 선사할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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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엄마 2005-07-10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협한 독서 습관 때문에 우리 나라 작가들을 잘 알지 못했어요. 덕분에 보관함에 넣고 갑니다~

검둥개 2005-07-11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보셔요 지우개님~~ ^^

돌바람 2005-07-19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어떻게 풀려나갈지 무척 기대하고 있어요. 어쩜 환타지로 갈지도 모른다는(아마, 그녀의 환타지는 세상을 좀 가볍게 보려는 시점에서 이뤄질 듯도 한데)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구요. 첫인사를 레나를 통해 하게 되었네요. 좋은 날 되세요.^^

검둥개 2005-07-19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의 추측이 맞을지 기대해볼께요 :) 돌바람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돌바람 2005-07-19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저 아직도 여기 있어요. 책 읽는 것보다 서재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는 걸 보니 저도 폐인의 세계로 들어선 것 같죠^^

검둥개 2005-07-19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시간 댓글 달기네요 ㅎㅎㅎ 폐인의 세계에 저도 있는 듯 하군요... :)
 

도망 (장정일)

도망가서 살고 싶다
정일이는 정어리가 되어
은희 이모는 은어가 되어
깊은 바다 속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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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개 2005-07-1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쥴님 그렇게 예리하게 말씀하시니, 갑자기 넘 슬퍼져요 ~~ :)
 

제가 유일하게 전문을 외우는 정현종의 <섬>이라는 시를 올렸더니 많은 분들이 비슷한 짧은 애송시를 올려주셨어요. 댓글로만 남겨두기 아까워서 그래서 여기다 정리했습니다. :)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__지우개님 선정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커브 (폴 엘뤼아르)__파비아나님 선정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삶 (황인숙)__
플레져님 선정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그리움 (유치환)__
판다님 선정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처럼 꿈쩍도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동네 한 바퀴 (외국동요/가사:윤석중)__
자명한 산책님 선정

다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한 바퀴
우리 보고 나팔꽃 인사합니다
우리도 인사하며 동네 한 바퀴
바둑이도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노래는 여기서 들으실 수 있어엽 http://pullip.ktdom.com/dyo/d117.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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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엄마 2005-07-10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렇게 정리해 주시니 댓글로 읽을 때 보다 좋군요. 저기 제일 위에 있는 시가 확실히 멋지구리하고요~ㅎㅎㅎ

날개 2005-07-10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윽~ 이럴 줄 알았으면 찾아서라도 하나 적어놓는건데....!!!

검둥개 2005-07-1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우개님, 그렇단 말이죠? 그 시가 괜히 젤 위에 갔겠어요? 선착순 배열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

날개님 시는 감상하는 거라니깐요~~ :)
 

자명한 산책 (황인숙)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나는 자명함을
퍽! 퍽! 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 하다.

-------------------------------------------------

걸을 때마다 앞으로는 꼭 이런 생각이 들 것 같아요. "아, 너무 자명해 ~~~"  (똘똘이 스머프처럼 하품한다)

(이 참에, ㅎㅎ 자명한 산책님 서재에 가서 인사드려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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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7-08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그러셔요.^^

릴케 현상 2005-07-08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퍼갈려고 그동안 안 올리고 있었나 봐요^^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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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엄마 2005-07-07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전문을 다 외는 시 하나 있어요!!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언제 기억해내도 가슴 뜨끔한.


paviana 2005-07-07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나
폴 엘뤼아르의 커브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플레져 2005-07-07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나,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황인숙의 시에요. (맞나? 갑자기 아리까리 ^^;;;)

날개 2005-07-07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외우는거 하나도 없어요~! (자랑스럽게....ㅎㅎ)

panda78 2005-07-07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파도. 누구 시인지는 기억도 안 나요.
중 1때 국어시간에 들었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처럼 꿈쩍도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검둥개 2005-07-08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시인이름은 생각 안 나지만 언제 배웠는지는 생각나신단 말이죠 ^^;; 청마 유치환의 <그리움>이네요 :)

날개님 그럼요, 저도 이거 하나밖에 못 외워요 ㅋㅋ

플레져님 이렇게 좋은 시를 ^^* 황인숙의 "삶"이네요. 제가 찾아봤답니다. 그런데 저 같았으면 제목을 "외상값"이라고 했을 거 같아요. 외상값, 그게 제가 사는 이유였군요, 이렇게 정직한 시라니 ~~ 요...

파비아나님도 이렇게 유명한 시를 ^^ 그런데 <커브>의 커브가 무슨 뜻일까요? Curve? Curb? 갈켜주세용 ~~

지우개님 저도 이 시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여기가 뜨끔, 가슴 저기가 뜨끔, 한답니다 :)

인터라겐 2005-07-08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시는 음미하는것입니다.. 외우는것이 아니구... (ㅋㅋㅋ 외우는 시가 하나도 없는 사람들의 강변입니다...)

검둥개 2005-07-08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책은 읽고 즐기는 것이다... 사서 쟁이는 것이 아니구"라고 책 안 사는 한 친구가 제게 강변했었답니다. 인터라겐님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릴케 현상 2005-07-08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시는 어때요?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검둥개 2005-07-10 0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명한 산책님 ㅎㅎㅎ 그건 동요 아녀요?
(노래는 여기서 들으실 수 있어엽 http://pullip.ktdom.com/dyo/d117.htm :)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한 바퀴
우리보고 나팔꽃 인사합니다
우리도 인사하며 동네 한 바퀴
바둑이도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릴케 현상 2005-07-10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냥 귀염을 떨어본 거죠...

검둥개 2005-07-11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정말 귀여우셔요 산책님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