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부지런을 떨며 <지상의 양식>을 열심히 읽었다. 그런데 막상 리뷰를 쓰려니까 어찌나 곤혹스러운지! 그 느낌이 꼭 일전에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다시 읽고서 난감하던 그 때의 느낌과 똑 겹치는 것이다.

지상의 양식, 불어판 커버 / 슬픔이여 안녕, 영화 포스터
<슬픔이여 안녕>이나 <지상의 양식>은 모두 일종의 청춘송가다. 전자는 십대의 소녀이던 사강이 썼고 후자는 결혼해서 막 정착한 지드가 썼다는 차이는 있지만, 둘 다 자신들의 청춘은 이것으로 끝났다는 표지석을 세우듯이 쓴 작품이고, 사강의 것에는 물론 회한이 소금처럼 배어 있지만, 둘다 펄펄 뛰는 청춘과의 뜨거운 연애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뜨거운 이 연애시를 이 시들시들한 우거지 같은 내가 읽으니 그 화학작용이 한 편의 희극이 되었다는 것이다. (cf. 슬픔이여 안녕을 극화한 영화를 봤는데 주인공인 세실 대신 중년의 세실 아빠와 그의 여자친구 중년 아줌마 안느에 공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이 난감함이라니!!!)
유미라는 말 자체가 무안할 지드의 섬세한 문장에는 (거기에다가 오래된 번역 속에 등장하는 옛 말들의 고풍스러움까지) 부르르 전율하며 읽다가도, "떠나라, 도망쳐라, 매순간이 인생의 전부인 양 생각하며 느끼고 사랑하고 반응해라, 헐벗어라, 굶주려라" 같은 열뜬 감각 예찬의 전언 앞에서는 그만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식 웃는 결례를 범하고 말았다.
저녁으로 먹는 한 알의 자두에서 인생의 열락을 맛보기 위해 아침 점심 굶고 새벽부터 걸으며 어지러움의 환희를 맛볼 생각을 하니 (듣기는 이렇게 좋을 수가 없으나) 실행에 옮기자고 한다면 어째 전혀 가슴이 뛰질 않는 게 아닌가! 배를 채우는 게 일차 목적이 아니라 인생을 풍요하게 해주는 게 목표라는 일류 요리사들이 들으면 질색할 말일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에 배고픔처럼 성가시고 끈질긴 고통은 없다. 배고프면 생각도 안 되고, 일도 안 되고, 머리는 어지러운데, 그걸 즐긴다는 건 따땃한 아랫목에 누워서 아무 일도 안 하고 시간을 때워도 되는 일요일의 늦은 오전에나 간신히 가능할까 말까 한 일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니, 시외버스, 고속버스 터미날이며 열차역을 지날 때마다 말 달리듯 뛰던 가슴은 다 어디로 갔나 적이 궁금하도다.
지드야, 너도 사실은 자리잡고 늙어가며 젊음의 한 때가 그리워서 청춘을 이렇게 과대선전를 한 게 아니냐,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아마 공평하게 나에게도 자신의 몫을 할애해준 청춘에 대한 예의가 아니리라. 게다가 지상의 모든 것을 다 자신의 감각으로 직접경험하고자 하는 그 무모한 패기에는 확실히 존경스러운 바가 있으니!
젊음에 경계가 있다면, 그 선 밖으로, 나는 조금씩 걸어나오고 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