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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양식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4
앙드레 지드 지음, 김붕구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좁은 문>이나 <전원교향곡>에서는 고리타분한 도덕주의자처럼만 보였던 지드도 청춘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 오직 회고되기만 하는 것이라고 애도할 줄 알았다. 유달리 감수성이 풍부한 작가들이란 누구나 질풍노도의 청춘기를 보내기 마련. 막 결혼을 하고 정착자의 삶을 택한 지드에게 대문 밖의 세상은 그래서 더욱더 그로서는 이제 영영 상실한 산해진미의 만찬상처럼 보였을 터다.
그 자신이 "도망과 해방의 안내서"라고 부른 이 책, <지상의 양식>에서 지드는 행복이란 우리가 살아 있는 매 순간 우리의 감각에 이 지상에 존재하는 수만가지 사물들이 선사하는 환희와 기쁨에 있다고 선언한다. 목마를 때 물 마시는 것, 배고플 때 씹어넘기는 한 조각의 빵, 더운 여름날 살짝 열린 창틈 새로 들어와 내린 눈꺼풀을 식히는 서늘한 공기의 흐름, 목장의 수풀 위로 번지는 습기. 이런 단순하고 일상적인 경험들이 이 책 속에서는 대략 백배쯤 증폭되어 우리의 가슴을 흔들어놓는다.
매순간을 천국처럼 누리며 살 수 있으려면 돈이 많아야 하는 것도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 대신 사람은 헐벗고 굶주린 자,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집착하거나 기대를 품지 않는 자, 영원히 도정에 있는 자로 살아야 한다. "시인의 재능이란, 자두처럼 하찮은 것에라도 감동할 줄 아는 것"이라고 지드는 말한다. 자두란 여름철 시장 좌판에서 그야말로 산처럼 쌓여 팔리는 싸구려 과일. 그런 시시한 자두에서도 인생의 열락을 맛보는 자는 흔한 과일의 맛조차도 기적인 양 열렬히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지상의 양식>은 젊음을 잃은 자가 노래한 젊음의 책이다. 향기롭고 산뜻한 오렌지 즙처럼 뿜어져 나오는 지드의 문장은 막 청춘의 기슭에 도달하는 이들을 도취시킨다. 반면 일방통행로만으로 이루어진 젊음의 다리를 이미 건너온 사람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같은 거대한 질문들과 더이상 드잡이질하지 않는 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잠시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리라.
책 말미의 아름다운 시는 독자로 하여금 왠지, 열광적 청춘예찬으로 정주 뒤의 허무함을 잊고자 했을 지드 자신조차도 아주 잠깐이나마 지나버린 청춘을 애도하고픈 통속적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 궁금해지게 한다.
알제리
언덕들이 와서 쉬고 있는 고원 지대.
날마다 낮이 숨죽어 가는 석양.
배들이 밀려드는 바닷가.
우리들의 사랑이 잠자러 오는 밤......
밤은 넓은 항만처럼 우리들에게로 오리라.
낮의 지친 상념도
광선도, 우울한 새들도,
거기에 와서 쉬리라
모든 그늘들 고요해지는 총림 속......
목장의 잔잔한 물, 풀 우거진 샘.
...... 그리고 기나긴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잔잔한 해변---항내의 배들.
우리들은 보리라, 가라앉은 물결 위에
방랑하던 닻을 내린 매인 배가
잠들어 있는 것을
우리들에게 온 밤이
정적과 우정의 넓은 항만을 펼쳐 놓는 것을.
바야흐로 모든 것이 잠드는 시각이다.
(p.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