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한 철  (유용주)
이상기에게

때론 하찮은 열정이
삶을 이끌어나간다네
어젠가 그젠가 노래방에 가서
새벽 두시까지 악을 썼다네
화장실에서 들었는데 각 방에서 부르는 노랫소리가
지옥에서 몸부림치는 귀신들의 울음소리로 들렸어

사는 것이 곧 지옥이야
(누가 그랬더라 정들면 지옥이라고)
지옥 한 귀퉁이 사글세 들어 라면을 끓이는 사람아
소주는 충분히 받아놓았는가

내 그리 곧 가겠네
밤새워 한번 취해보세나

 

유용주,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짐>, 17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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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일본어를 하나도 모르는데요.

좀 배워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흑흑.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나온 교재가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일본어 어렵나요? 에고고...)  

 

꾸벅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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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3-2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사 사람들, 16일 만에 독하게 일본어 끝내기>

전 잘 모르지만, 얼마 전 판다님이 아주 재밌게 읽으셨다는 책이에요.
상품넣기가 안 되네요.

panda78 2006-03-21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재미있는 책은 아닌데요. ^^;; 정리가 깔끔하게 잘 되어 있는 책이었어요.
ninoming님이 권해 주셔서 본 책인데, 기본문법 정리용으로 참 좋더라구요.
진짜로 처음 시작하시는 거라면 그 다음으로 추천받은 수라수라 일본어도 괜찮다고 합니다. 첫걸음, 초급, 중급 세 단계래요.

검둥개 2006-03-22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감사합니다. ^ .^ 전 진짜로 초보거든요. 글자도 모르는.
아, 걱정이에요.

로드무비님 감사합니다. ^^ 그런데 그 책을 보기 전에 쉬운 책을 하나 보아야 할 것 같아요. 그 책은 좀 어려운 듯. 흑흑.
 

고종석의 산문집 <자유의 무늬>를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모두 길이가 매우 짧고 제목이 심심하고 평범하다. 원래 신문과 잡지의 짧은 토막글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념의 진영이 어떻게 갈리고 그에 따른 표딱지가 어떻게 붙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종석은 대략,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며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는 점진적-합리적 보수주의자이다. 

물론 이 때 보수주의는 좌파와 대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그래서 전체주의와 대비되면 자유주의라고 불려야 더 적절하다. 보수와 진보는 상대적 개념이므로. (그는 시장경제를 지지하고 현실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사회주의 이념의 실패로 인정하므로 자신은 좌파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는 자유주의자와 좌파를 구분하는 적절한 기준이다. 물론 시민적 자유의 최대화라는 그의 과제는 좌파의 방향과 부분적으로 일치하므로,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진보적이라고 통칭될 수 있다. 진보와 개혁에 대한 믿음은 좌파의 독점물은 아니다.) 시민적 자유의 확대라는 그의 과제는 좌파의 방향과 부분적으로 일치한다. "조갑제를 얼러가며 가르치는" 진중권에게 지지를 보내는 고종석은 유머를 아는 보수주의자다.  

반면 고종석 자신의 글은 "얼러가며 가르치는" 종류와는 무관하므로, 그의 책이 의도하는 독자는 수구적 전체주의자들이 아니라 야심찬 좌파들이다.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실현하겠다는 열정에 넘치는 더운 피의 좌파들을 그는 아주 진지하게 두려워한다. 그의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이런 두려움이 나오는 것인지 그 두려움으로부터 그의 자유주의적 입장이 결과되었는지가 궁금해질 정도로. (하긴 그 두려움은 전체주의와 좌파가 공유하는 저 너무 뜨거운 믿음과 열정에 공히 해당되기는 하겠다.) 

고종석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 모양새가 그의 온건한 합리적 보수주의와 딱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의 글은 특별한 미문이 아니고, 그의 산문에는 화려하거나 극적인 맛이 없다. (포도주를 즐겨 마신다고 하지만 그는 아마 낭만주의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글에는 상식에 기반한 반성에서 나오는 통찰력이 있고, 그가 쓰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논리의 비약이 없다.

단정한 문장을 쓰는 겸손한 자유주의자.  이것이 내가 그의 책에서 받은 인상이다. 나는 고종석의 얼굴 사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내 상상 속에서 그는 왠지 조금 구겨진 바지를 입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의 외모는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중년 남자)의 모습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의 정치적 입장과 글과 외모는 모두 일관적으로 온건한 모양이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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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3-2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그런데 그의 글이 저는 재미가 없어요.
취향이 좀 다른 거겠지요?^^

검둥개 2006-03-22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그렇게 생각하는 작가가 있어요. 보통. ^^;;;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가 재미가 없더라구요.

마태우스 2006-03-22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재미있게 읽었어요. 고종석님은 글에 있어서는 제 우상이지요. 근데 왜 리뷰에 안쓰시고...??

검둥개 2006-03-23 0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이 고종석씨 팬이시군요! ^^
요새 뻬빠거리가 부족해서 ㅎㅎㅎ
사실은 책에 대한 내용이 별로 없어서 리뷰가 안 되는 거 같았어요. :-)
 
자유의 무늬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10월
품절


우리말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복잡하고 엄격하고 정교한 경어 체계를 지닌 언어다. 우리말의 2인칭 대명사는 연령이나 신분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또는 연령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나 사용될 뿐, 존칭을 사용해야 할 자리엔 아예 사용되지 않는다. 그 경우 한국인들은 그 자리를 비워두거나 연령적-가족적-직업적-신분적 위계를 표시하는 명사(선배님, 아버님, 국장님, 선생님, 숙자 씨 등)를 사용한다. 2인칭 대명사만 위계에 예민한 것이 아니다. 한국어는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과 자신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언어다. 언어로 표현되는 그 위계질서를 우리는 다시 그 언어를 통해 내면화한다. 경어를 썼느냐 반말을 썼느냐가 흔히 사람들 사이의 다툼의 원인이 되는 것이 그 증거다.

경어법은 연령의 위계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분적 위계(갑오경장 이래 법률적 신분이야 없어졌지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계급'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신분)를 드러내교, 그 신분적 위계는 그것을 드러내는 경어법에 의해 다시 강화된다. 한국어가 민주주의적인 언어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국어에 대한 내 애정에 주름을 만든다.

--경어-158-159쪽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소설 문장의 문제점이 문체 이전의 것이듯, 한국어 논문 문장의 문제점도 논리적 일관성 이전의 것이다. 다시 말해 글이 되지 못한 '학술적 메모'에서 논리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시도다. 그런데도 가끔씩 학술 논쟁이 있는 게 신기하기는 하다. 사실 비문은 한국어 출판물에 너무나 만연해 있어서, 그걸 지적하는 사람이 신경증 환자라고 핀잔받을 정도다. 나도 내 발 밑이 불안하다. 비문투성이의 글을 밤낮없이 읽고 있으니, 나 역시 비문의 함정을 빠져나갈 자신이 없다.

나는 백낙청이나 정과리의 애독자인데, 그것은 그들의 아슬아슬한 지적 곡예나 눈부신 수사에 혹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문장에서 비문을 발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학비평이 임화나 최재서의 시대로부터 얼마간이라도 진화했다면, 그 진화는 세계관의 확장이나 논리의 세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문의 감소를 의미할 것이다. 백낙청이나 정과리 같은 비평가가 그런 진화의 증거지만, 문제는 그들이 우리 문단의 장삼이사가 아니라 예외적인 글쟁이에 속한다는 사실에 있다.

----"메모"와 "글"-162쪽

사람에 대한 사람의 감정은 기본적으로 적대감이고 경쟁심이다.

그런 사정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볼 능력이 인간에게 없는 것은 아니다. 염치나 양심 같은 것이 그 반성적 능력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 염치나 반성의 항진은 투쟁력의 수축을 의미한다. 반성하는 사이에 남의 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은 반성하기보다는 싸운다.

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종말론적 이데올로기들은 그런 염치나 양심 같은 인간의 반성 능력을 과대평가하거나 인간의 비루함의 원인을 인간 바깥의 구조에서 찾으면서 유토피아의 건설을 꿈꾼다. 그러나 유토피아니즘이라는 말을 거부하고 과학의 옷을 걸쳤던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해 모든 유토피아니즘이 실패로 돌아간 사실은, 인간의 반성 능력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될 만큼 크지는 않다는 것, 인간의 비루함의 원인은 그 적지 않은 부분이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기독교의 역사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는 사랑의 이름으로 이룩한 증오의 역사다. 그들이 내건 사랑이 그렇게 크지만 않았더라도, 그들이 역사 속에서 실천한 증오의 크기가 그렇게 엄청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모든 유토피아니즘이 그려온 유토피아는 먼 미래나 과거, 또는 외딴 섬에 설정돼 있다. 그들이 그리는 유토피아가 지금 이 곳과는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는 사랑이나 우애는 무책임하게 클 수 있었고, 그 반동으로 그들이 실천한 증오도 덩달아 그리 클 수 있었다.

바로 여기서 반-유토피아주의자의 금언이 나온다: 남을 도우려고 애쓰지 마라. 남을 해치지 않도록 애쓰라.

--유토피아에 反해-233쪽

개인에 대한 존중과 이해, 개인주의적 상상력은 지금 공산주의를 대치해 지구를 피로 물들이고 있는 커다란 집단주의, 예컨대 종교적 근본주의나 약화된 파시즘으로서의 민족주의에 대한 처방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지역주의나 이런저런 연고주의 같은 작은 집단주의에 대한 처방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최대의 선이 아니라 최소의 악을 목표로 삼는 소극적 도덕의 출발이기도 하다.

--개인주의적 상상력(1)-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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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3-22 0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을 도우려고 애쓰지 마라. 남을 해치지 않도록 애써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훌륭한 인간이 되기는커녕 기본이라도 충실히...^^


검둥개 2006-03-22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기본이 젤 어렵잖아요. 인간은 변덕의 동물인지라. ^^
 

일주일 내내 페이퍼를 쓰고 있다. 오늘도 세시간 반을 학교 도서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왔으며 지금도 한 두시간 쯤 계속 집에서 컴퓨터 모니터 위에 뜬 알파벳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진도는 느리기만 하다. 대단한 페이퍼를 쓰는 것도 아닌데 문제는 속도다. 나의 글쓰는 속도는 비효율적이라거나 느리다, 라는 정도를 넘어서 거의 가망이 없는 수준이다. 일주일 내내 쓰고 있는 페이퍼의 장수는 다섯 장. 글자 크기도 크며 줄간격도 겁나게 넓으므로 사실 글자 수로 따지면 정말이지 빡빡하게 쓴 한글 레포트 2-3장 수준이다. 게다가 페이퍼의 주제 자체도 정말이지 이렇게 무수한 시간을 잡아먹을 가치가 전혀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욱더 슬프게 한다. (소멸될 위기에 처한 13세기 일본 종교화의 디지탈화/복제품 제조 문제에 내가 정녕 나의 열 시간을 바쳐야 한단 말인가.)

어느 정도 살다보면 갑자기 실패한 인생이라는 느낌이 둔탁하게 (날카롭거나 쇼킹하게가 아니다) 뒷머리를 칠 때가 있는데 지금 이 중간고사 페이퍼를 쓰면서 그런 느낌을 받고 있다. 나는 영화에서 뻔하게 예정된 결말을 싫어하는 편인데 그래서 인간의 인생도 무수한 시련을 겪다가 끝내는 성공하고 만다는 스토리보다는 실패가 반복되고 반전은 끝끝내 일어나지 않더라는 식이 흥미롭다고 여기는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참으로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기도 하지!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그런 거창한 철학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보니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 영화, 살인의 추억, 을 보고 엔딩 장면에서 방바닥을 치며 안타까와한 후 (영화 광고문구대로 나도 정말 범인이 미친듯이 잡고 싶었던 것이다) 무려 두 시간 반을 안 나아지는 레포트를 들여다보며 철자 고치기, 문단 바꾸기, 문장 재배열하기를 반복하는 동안 내 식의 사고를 적용하자면 꽤 흥미로워야 할 (실패가 반복되고 반전은 일어나지 않는) 내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라는 이 덤덤하나 분명한 확신이 나를 짓누르는 것이었다. 아아아.  

이런 자서전을 읽고 싶다. 아무개는 젊은 시절 늘 실패한 인생이 될까 두렵다는 가벼운 불안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 불안이 가벼웠던 것은 아무개의 불안을 확신으로 바꾸어줄 시간이 충분히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무개가 중년으로 접어서자 그 확신이 서서히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른 중년, 아무개는 그래도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뭔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 곤란스럽고 근거 없는 의심! 아무개의 인생에는 크고 작은 실패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어느 순간에 아무개는 드디어 결정적으로 그의 인생은 종쳤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마침내 그에게 찾아온 이 앎의 지리멸렬함! 결국 인생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아무개는 평범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누가 이런 자서전을 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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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3-19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

물만두 2006-03-19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ㅡ.ㅡ

blowup 2006-03-19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자서전이란 장르 자체가 영 당기지가 않아요. 성공했건 실패했건, 지루해요.

검둥개 2006-03-19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저랑 술 한 잔 하셔야 하겠는데요. ^^
쓰시기만 하면 제가 흥미진진하게 읽어드리겠습니다.

만두님 일케 예쁜 하트를 가지시고 그런 얼굴을 하심 안 어울려요!!! 헤헤.

namu님 전 특정 종류의 수고나 자서전에 취약해요.
시몬느 베이유라거나 실비아 플라쓰라거나.

blowup 2006-03-19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시콜콜함을 못 견디는 것 같아요(중간에 건너뛰고 싶은 욕망을 느껴요). 현실이 비현실적인 기분들. 저런 여인들의 책을 보면서도 그랬어요.(실비아 플라스는 <벨자>만 읽었어요.)

조선인 2006-03-19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자서전은 없어도 그런 소설은 꽤 있지 않나요. 읽고 나면 정말 허망해지는.

플레져 2006-03-19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조리 소설 같아요.
잉크냄새님이 1편 쓰시고 2편은 제가 ^^:;

진주 2006-03-19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또....그런 자서전 쓰겠다는 허영심 가득한 사람들의 뒤를 봐줬다는....ㅡ.ㅡ
흠냐.. 서글프다..

검둥개 2006-03-20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 으하하하 그러셨어요? ^__________^*
뭐 그럴 수도 있죠. 슬퍼하지 마세요.

플레져님까지! 글의 수준이 너무 높아질 것 같아요. 잉크냄새님과 플레져님이 쓰시면요. ^^

조선인님 음 그런 거 같아요. 함순의 소설 같은 거.

namu님 전 시시콜콜함이 정답다가 웬수 같다가 그래요.
건너뛰면서 읽는 것에 전 죄의식을 안 느껴요.

2006-03-20 1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3-21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은 알콩달콩 재미나게 사시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