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복잡하고 엄격하고 정교한 경어 체계를 지닌 언어다. 우리말의 2인칭 대명사는 연령이나 신분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또는 연령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나 사용될 뿐, 존칭을 사용해야 할 자리엔 아예 사용되지 않는다. 그 경우 한국인들은 그 자리를 비워두거나 연령적-가족적-직업적-신분적 위계를 표시하는 명사(선배님, 아버님, 국장님, 선생님, 숙자 씨 등)를 사용한다. 2인칭 대명사만 위계에 예민한 것이 아니다. 한국어는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과 자신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언어다. 언어로 표현되는 그 위계질서를 우리는 다시 그 언어를 통해 내면화한다. 경어를 썼느냐 반말을 썼느냐가 흔히 사람들 사이의 다툼의 원인이 되는 것이 그 증거다.
경어법은 연령의 위계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분적 위계(갑오경장 이래 법률적 신분이야 없어졌지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계급'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신분)를 드러내교, 그 신분적 위계는 그것을 드러내는 경어법에 의해 다시 강화된다. 한국어가 민주주의적인 언어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국어에 대한 내 애정에 주름을 만든다.
--경어-158-159쪽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소설 문장의 문제점이 문체 이전의 것이듯, 한국어 논문 문장의 문제점도 논리적 일관성 이전의 것이다. 다시 말해 글이 되지 못한 '학술적 메모'에서 논리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시도다. 그런데도 가끔씩 학술 논쟁이 있는 게 신기하기는 하다. 사실 비문은 한국어 출판물에 너무나 만연해 있어서, 그걸 지적하는 사람이 신경증 환자라고 핀잔받을 정도다. 나도 내 발 밑이 불안하다. 비문투성이의 글을 밤낮없이 읽고 있으니, 나 역시 비문의 함정을 빠져나갈 자신이 없다.
나는 백낙청이나 정과리의 애독자인데, 그것은 그들의 아슬아슬한 지적 곡예나 눈부신 수사에 혹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문장에서 비문을 발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학비평이 임화나 최재서의 시대로부터 얼마간이라도 진화했다면, 그 진화는 세계관의 확장이나 논리의 세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문의 감소를 의미할 것이다. 백낙청이나 정과리 같은 비평가가 그런 진화의 증거지만, 문제는 그들이 우리 문단의 장삼이사가 아니라 예외적인 글쟁이에 속한다는 사실에 있다.
----"메모"와 "글"-162쪽
사람에 대한 사람의 감정은 기본적으로 적대감이고 경쟁심이다.
그런 사정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볼 능력이 인간에게 없는 것은 아니다. 염치나 양심 같은 것이 그 반성적 능력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 염치나 반성의 항진은 투쟁력의 수축을 의미한다. 반성하는 사이에 남의 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은 반성하기보다는 싸운다.
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종말론적 이데올로기들은 그런 염치나 양심 같은 인간의 반성 능력을 과대평가하거나 인간의 비루함의 원인을 인간 바깥의 구조에서 찾으면서 유토피아의 건설을 꿈꾼다. 그러나 유토피아니즘이라는 말을 거부하고 과학의 옷을 걸쳤던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해 모든 유토피아니즘이 실패로 돌아간 사실은, 인간의 반성 능력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될 만큼 크지는 않다는 것, 인간의 비루함의 원인은 그 적지 않은 부분이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기독교의 역사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는 사랑의 이름으로 이룩한 증오의 역사다. 그들이 내건 사랑이 그렇게 크지만 않았더라도, 그들이 역사 속에서 실천한 증오의 크기가 그렇게 엄청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모든 유토피아니즘이 그려온 유토피아는 먼 미래나 과거, 또는 외딴 섬에 설정돼 있다. 그들이 그리는 유토피아가 지금 이 곳과는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는 사랑이나 우애는 무책임하게 클 수 있었고, 그 반동으로 그들이 실천한 증오도 덩달아 그리 클 수 있었다.
바로 여기서 반-유토피아주의자의 금언이 나온다: 남을 도우려고 애쓰지 마라. 남을 해치지 않도록 애쓰라.
--유토피아에 反해-233쪽
개인에 대한 존중과 이해, 개인주의적 상상력은 지금 공산주의를 대치해 지구를 피로 물들이고 있는 커다란 집단주의, 예컨대 종교적 근본주의나 약화된 파시즘으로서의 민족주의에 대한 처방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지역주의나 이런저런 연고주의 같은 작은 집단주의에 대한 처방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최대의 선이 아니라 최소의 악을 목표로 삼는 소극적 도덕의 출발이기도 하다.
--개인주의적 상상력(1)-25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