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내내 페이퍼를 쓰고 있다. 오늘도 세시간 반을 학교 도서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왔으며 지금도 한 두시간 쯤 계속 집에서 컴퓨터 모니터 위에 뜬 알파벳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진도는 느리기만 하다. 대단한 페이퍼를 쓰는 것도 아닌데 문제는 속도다. 나의 글쓰는 속도는 비효율적이라거나 느리다, 라는 정도를 넘어서 거의 가망이 없는 수준이다. 일주일 내내 쓰고 있는 페이퍼의 장수는 다섯 장. 글자 크기도 크며 줄간격도 겁나게 넓으므로 사실 글자 수로 따지면 정말이지 빡빡하게 쓴 한글 레포트 2-3장 수준이다. 게다가 페이퍼의 주제 자체도 정말이지 이렇게 무수한 시간을 잡아먹을 가치가 전혀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욱더 슬프게 한다. (소멸될 위기에 처한 13세기 일본 종교화의 디지탈화/복제품 제조 문제에 내가 정녕 나의 열 시간을 바쳐야 한단 말인가.)

어느 정도 살다보면 갑자기 실패한 인생이라는 느낌이 둔탁하게 (날카롭거나 쇼킹하게가 아니다) 뒷머리를 칠 때가 있는데 지금 이 중간고사 페이퍼를 쓰면서 그런 느낌을 받고 있다. 나는 영화에서 뻔하게 예정된 결말을 싫어하는 편인데 그래서 인간의 인생도 무수한 시련을 겪다가 끝내는 성공하고 만다는 스토리보다는 실패가 반복되고 반전은 끝끝내 일어나지 않더라는 식이 흥미롭다고 여기는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참으로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기도 하지!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그런 거창한 철학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보니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 영화, 살인의 추억, 을 보고 엔딩 장면에서 방바닥을 치며 안타까와한 후 (영화 광고문구대로 나도 정말 범인이 미친듯이 잡고 싶었던 것이다) 무려 두 시간 반을 안 나아지는 레포트를 들여다보며 철자 고치기, 문단 바꾸기, 문장 재배열하기를 반복하는 동안 내 식의 사고를 적용하자면 꽤 흥미로워야 할 (실패가 반복되고 반전은 일어나지 않는) 내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라는 이 덤덤하나 분명한 확신이 나를 짓누르는 것이었다. 아아아.  

이런 자서전을 읽고 싶다. 아무개는 젊은 시절 늘 실패한 인생이 될까 두렵다는 가벼운 불안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 불안이 가벼웠던 것은 아무개의 불안을 확신으로 바꾸어줄 시간이 충분히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무개가 중년으로 접어서자 그 확신이 서서히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른 중년, 아무개는 그래도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뭔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 곤란스럽고 근거 없는 의심! 아무개의 인생에는 크고 작은 실패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어느 순간에 아무개는 드디어 결정적으로 그의 인생은 종쳤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마침내 그에게 찾아온 이 앎의 지리멸렬함! 결국 인생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아무개는 평범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누가 이런 자서전을 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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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3-19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

물만두 2006-03-19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ㅡ.ㅡ

blowup 2006-03-19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자서전이란 장르 자체가 영 당기지가 않아요. 성공했건 실패했건, 지루해요.

검둥개 2006-03-19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저랑 술 한 잔 하셔야 하겠는데요. ^^
쓰시기만 하면 제가 흥미진진하게 읽어드리겠습니다.

만두님 일케 예쁜 하트를 가지시고 그런 얼굴을 하심 안 어울려요!!! 헤헤.

namu님 전 특정 종류의 수고나 자서전에 취약해요.
시몬느 베이유라거나 실비아 플라쓰라거나.

blowup 2006-03-19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시콜콜함을 못 견디는 것 같아요(중간에 건너뛰고 싶은 욕망을 느껴요). 현실이 비현실적인 기분들. 저런 여인들의 책을 보면서도 그랬어요.(실비아 플라스는 <벨자>만 읽었어요.)

조선인 2006-03-19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자서전은 없어도 그런 소설은 꽤 있지 않나요. 읽고 나면 정말 허망해지는.

플레져 2006-03-19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조리 소설 같아요.
잉크냄새님이 1편 쓰시고 2편은 제가 ^^:;

진주 2006-03-19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또....그런 자서전 쓰겠다는 허영심 가득한 사람들의 뒤를 봐줬다는....ㅡ.ㅡ
흠냐.. 서글프다..

검둥개 2006-03-20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 으하하하 그러셨어요? ^__________^*
뭐 그럴 수도 있죠. 슬퍼하지 마세요.

플레져님까지! 글의 수준이 너무 높아질 것 같아요. 잉크냄새님과 플레져님이 쓰시면요. ^^

조선인님 음 그런 거 같아요. 함순의 소설 같은 거.

namu님 전 시시콜콜함이 정답다가 웬수 같다가 그래요.
건너뛰면서 읽는 것에 전 죄의식을 안 느껴요.

2006-03-20 1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3-21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은 알콩달콩 재미나게 사시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