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의 산문집 <자유의 무늬>를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모두 길이가 매우 짧고 제목이 심심하고 평범하다. 원래 신문과 잡지의 짧은 토막글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념의 진영이 어떻게 갈리고 그에 따른 표딱지가 어떻게 붙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종석은 대략,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며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는 점진적-합리적 보수주의자이다.
물론 이 때 보수주의는 좌파와 대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그래서 전체주의와 대비되면 자유주의라고 불려야 더 적절하다. 보수와 진보는 상대적 개념이므로. (그는 시장경제를 지지하고 현실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사회주의 이념의 실패로 인정하므로 자신은 좌파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는 자유주의자와 좌파를 구분하는 적절한 기준이다. 물론 시민적 자유의 최대화라는 그의 과제는 좌파의 방향과 부분적으로 일치하므로,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진보적이라고 통칭될 수 있다. 진보와 개혁에 대한 믿음은 좌파의 독점물은 아니다.) 시민적 자유의 확대라는 그의 과제는 좌파의 방향과 부분적으로 일치한다. "조갑제를 얼러가며 가르치는" 진중권에게 지지를 보내는 고종석은 유머를 아는 보수주의자다.
반면 고종석 자신의 글은 "얼러가며 가르치는" 종류와는 무관하므로, 그의 책이 의도하는 독자는 수구적 전체주의자들이 아니라 야심찬 좌파들이다.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실현하겠다는 열정에 넘치는 더운 피의 좌파들을 그는 아주 진지하게 두려워한다. 그의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이런 두려움이 나오는 것인지 그 두려움으로부터 그의 자유주의적 입장이 결과되었는지가 궁금해질 정도로. (하긴 그 두려움은 전체주의와 좌파가 공유하는 저 너무 뜨거운 믿음과 열정에 공히 해당되기는 하겠다.)
고종석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 모양새가 그의 온건한 합리적 보수주의와 딱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의 글은 특별한 미문이 아니고, 그의 산문에는 화려하거나 극적인 맛이 없다. (포도주를 즐겨 마신다고 하지만 그는 아마 낭만주의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글에는 상식에 기반한 반성에서 나오는 통찰력이 있고, 그가 쓰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논리의 비약이 없다.
단정한 문장을 쓰는 겸손한 자유주의자. 이것이 내가 그의 책에서 받은 인상이다. 나는 고종석의 얼굴 사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내 상상 속에서 그는 왠지 조금 구겨진 바지를 입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의 외모는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중년 남자)의 모습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의 정치적 입장과 글과 외모는 모두 일관적으로 온건한 모양이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