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드무비 > 늦어도 11월에는
순전히 책 제목에 끌려 장바구니에 포함시킨 책이 두 권.
<늦어도 11월에는>과 <내 방 여행>.
참, <내 방 여행>은 최종 순간 4만 원어치의 장바구니에서 밀려났다.
끝전이 좀 모자랐던가?
다음 주문을 기약할 수밖에.....
백남준 씨의 어느 글을 보고 얼굴이 붉어졌던 적이 있다.
젊은이들이 왜 이 좋은 삶을 직접 살지 않고
어두운 극장에서 청춘을 다 보내는지 모르겠다고,
남의 연애 이야기에나 열광하며......
그때나 지금이나 어두운 극장이나 골방에서 영화를 볼 때와 책을 읽을 때가
제일 복장 편한 나로서는 가슴 뜨끔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늦가을은, 천하의 게으름뱅이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외버스에 오르게 하는 힘이 있다.
'내 방 여행'이 아무리 세상에서 제일 편하고 좋다지만 진짜 여행에 비하겠는가!
그래서 나의 경우 1박 2일의 짧은 여행은 주로 늦가을에 이루어졌다.
전남 화순 운주사에는 두 번인가 세 번 갔다. 너무 좋아서, 광주 비엔날레 할 때 봄에 한 번,
그리고 어느 해 늦가을.....
오래 전 내가 꽤 열심히 다니던 작은 교회에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독일로 박사 코스 유학을 떠나게 된 청년이 있었는데 출발 사흘 전엔가 갑자기
근처를 지나다가 잠시 들렀다면 전화를 걸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되겠다며 얼마 전에 한 약혼을 깨고 나에게 뭔가 고백하려는 것인가
가슴 부풀어 나갔더니 달랑 시집 한 권을 주고 가버렸다.
고정희 유고 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시집을 선물받고 그 다음 해, 삼산면에 있는 고정희 시인 생가와 운주사를 묶었던 여정에
이 시집은 좋은 동무가 되어주었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운이라는 것을 안ㄷ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詩 '사십대' 중에서)
시집의 맨 마지막에 실린, '사십대'와 '독신자'라는 시 두 편은 언제 읽어도 가슴이 철렁하다.
더구나 그것이 늦가을의 운주사 뒷산 언덕배기 벤치 위라면......
황지우 등 운주사나 그 절의 와불에 대해 시를 쓴 시인들은 꽤 많지만
그 중에서도 1992년에 나온 <운주사 가는 길>이라는 임동확의 시집도 좋다.

삶이 꼭 그렇다. 자신도 몰래
얼마나 많은 피리구멍을 마음 깊숙이
감추고 있었던가. 그뿐인가
이제 안심이다 싶으면 병들거나
뜻하지 않는 곳에서 소환을 받는다
제 몸 속에 그리도 뾰족한 쇠못이
박혀 있음을 알고 크게 놀란다(詩 ' 입석 - 통일호3 중에서)
망월동 묘역, 고정희 시인의 生家, 다산 초당, 운주사, 광주 비엔날레, 그리고
광주 번화가의 '브레히트와 노신'이라는 이름의 카페.
내맘대로 이곳저곳 묶어서 혼자 갔던 남도 여행의 백미는 단연 늦가을.
과년한 처녀가 혼자 왔다고 혀를 쯧쯧 차며 방값을 만 원만 받고,
백반과 술을 시켰더니 추어탕까지 한 그릇 따로 챙겨주시던
어느 민박집 수더분한 아주머니의 얼굴과, 꼬끼오 닭 우는 소리에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에 나갔더니 와락 달려들던 차디찬 공기와 연기 냄새,
그리고 저녁에 이어 다시 찾은 그 운주사의 아침을 잊을 수 없다.
며칠 전 <씨네21>을 읽는데 <경의선>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백마역 문정역 등 열차가 지나는 역들 이름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막 두근거렸다.
늦어도 11월에는 시집 두어 권을 들고 먼 길을 하루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