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 내 마음에는 자잘한 소망이 가득하던 고등학교 시절의 꿈 중 하나는 번역가였다. 참으로 인생 쉽게 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때 생각으로는 번역가가 되면 읽고 싶은 책도 마음대로 읽고, 영어 실력도 늘릴 수 있고, 게다가 돈까지 받게 되니 세상에 그렇게 좋은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어찌하다가 영문과에 가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영문과에 입학하자마자 영어 소설을 붙들고 번역하기 시작했다. 번역가가 되는 가장 간단한 길은 실제로 번역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시작해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모두 세 권의 책을 번역했다. 여건만 허락했다면 더 많이 번역했을 텐데,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라 그 정도에 그쳤다. 그러니까 대학 시절 내가 번역한 세 권의 책은 이 세상에 단 한 번도 출간된 적이 없다는 얘기다. 물론 지금은 출간할 생각도 없다. 어쨌든 그때 번역한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였다. 한참 원고를 뒤적거리던 편집장은 화기애애한 소리만 한참 했다. 공부는 잘 되느냐? 사귀는 여자친구는 없느냐? 뭐, 그런 질문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금방 알아먹었다. 세상의 어떤 출판사도 무작정 찾아온 대학교 2학년 학생의 원고를 출판하지는 않는다.

뭐, 그걸로 끝이었다. 좌절하거나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나이가 좀 들어보여야지, 설득력이 있겠구나 정도의 감회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 내게 말했다. 먼저 등단부터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면 번역도 쉽게 할 수 있을 텐데. 문학에 관심도 있었던데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아무래도 영문과 졸업생으로는 좀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어찌하다가 등단하게 됐고, 그 사람 말대로 등단한 탓에 이런저런 책들을 번역할 수 있게 됐다. 출판사가 대학교 2학년생보다는 등단한 작가를 더 선호하리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내게도 출판사 직원이 찾아왔다. 그는 내게 번역을 의뢰했다. 혼자 번역한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간 지 거의 13년 만이었다. 마음이 뿌듯했다. 책을 들춰보니 야심작이라는 그의 말대로 아주 잘 팔릴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책이 일본책이라는 점. 그 사람은 일본어를 못한다면 도와준다고 얘기했다. 무슨 수로? 아마 무슨 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 소망이 아무리 자잘하기로서니 거기에 일본어 번역가는 없었으므로 나는 그 일을 거절했다. 차라리 공부는 잘 되느냐고 물었으면 좋았을 텐데.

번역서를 내고 나서 전전긍긍 잠도 못 잘 때가 있다. 오역이 발견됐을 때다. 대개 끝까지 뜻을 알아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때 오역이 생긴다. 번역가에게 윤리를 저버리는 일이 있다면 바로 이런 일이다. 왜 이런 일에 윤리를 들먹이냐면 번역에 대한 금전적인 대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 소위 이중번역이라는 게 문제가 됐을 때, 해당 출판사 쪽은 어려운 출판계 사정을 거론했다. 그걸 번역가의 표현으로 번역하자면, 돈 때문에 대충 번역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뭐, 그럴 수도 있다. 돈 때문에 대충 번역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왜 번역 따위를 하겠는가. 이 세상에는 그보다 돈을 잘 벌 수 있는 직업이 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데. 문제는 출판계의 사정은 앞으로도 계속 어려울 것 같고, 번역료도 크게 오를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댈 것은 오직 칸트가 말한 ‘저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 내 마음에는 도덕률’과 같은 명징한 윤리뿐일 텐데, 왜 그랬을까? 공부는 잘 되는지, 사귀는 여자친구는 없는지, 그런 질문이나 던질 수 있다면 참 화기애애한 출판사가 될 텐데.

김연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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