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낙하산 타고 추락하다

담론이 사라진 시대를 만든 건 인터넷과 ‘코드 인사’를 단행한 정권… 개혁세력이 감투를 향해 줄을 서게 되면서 내부 비판의 숨통이 끊어져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금 우리 사회에는 절필 선언은 하지 않았지만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 공적인 글쓰기를 절대로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실제로 쓰지 않고 있다. 이렇게 공적인 글쓰기가 어려운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 보은 인사, 낙하산 인사 논란에 휘말렸던 이재용 전 환경부 장관은 국민건강보험공단 신임 이사장에 임용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글쓰기는 내 편과 네 편을 정해놓고 자기 말만 한다. 피차 귀를 막고 남의 말은 듣지 않는다. 우리 편 잘한다, 우리 편 잘해라다.”

나는 왜 전투성을 버렸을까

언론인 김선주가 최근 <한겨레>에 기고한 ‘담론이 사라진 시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 말이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렇게 된 데엔 나처럼 이른바 ‘전투적 글쓰기’를 했던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 주장에 꽤 동의한다.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꽤’ 동의한다는 건 이 문제가 의외로 복잡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문제는 인터넷이다. 한때 ‘전투적 글쓰기’를 했던 지식인들도 인터넷 앞에선 다 굴복했다. 인터넷은 익명 또는 무명 논객의 바다이고 그 논객들은 적나라한 인정투쟁과 더불어 노골적인 배설을 원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들과 대적할 순 없다. 감히 인터넷 논객을 폄하하는 게 아니다. 인터넷엔 평범한 시민들이 쓴 보석 같은 글들이 많지만, 그런 면도 있다는 점에서 하는 말이다.

나는 공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할 생각이지만 전투성은 버렸다. 물론 어떤 사람들의 관점에선 여전히 전투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 딴엔 요즘은 주로 사랑과 포용을 역설하기 위해 애를 쓴다(내가 말해놓고도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나는 왜 그렇게 달라졌을까? 인터넷이라는 임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간 늘 종이를 상대로 글을 써왔다. 그 글이 인터넷에 실린 적은 많지만, 나는 인터넷을 직접 상대하는 건 한사코 피해왔다. 그런 식으로 대응하더라도 인터넷은 피할 수 없게 되었으니 내가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나는 ‘전투적 글쓰기’는 인터넷 시대엔 맞지 않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전투성의 가공할 전염성과 상승 효과 때문이다. 물론 그간 인터넷에서도 ‘전투적 글쓰기’를 한 지식인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여기엔 한 가지 법칙이 작동한다. 그건 ‘전투적 글쓰기’는 이름을 얻을 때까지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름을 얻으면 그걸 할 수 없게 돼 있다.

속된 말로 “이젠 떴으니까 점잖게 지내겠다는 속셈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명도가 높아질수록 반격이 늘고 독해지기 때문에 견뎌내기가 힘들어진다. 아니면 그 어떤 반격이나 폭격이 쏟아져도 개의치 않을 만큼 기계 같은 신경줄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과연 늘 성찰을 해야 할 지식인으로서 바람직한 품성인지는 의문이다. 그건 그야말로 ‘광신도’로 가는 길이 아닐까?

전투성은 주로 아웃사이더들의 특성인데, 아웃사이더들은 ‘1인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자신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언행이 낳을 수 있는 부작용에 둔감하다. 이 부작용 문제는 전투적 대통령이라 할 노무현에 이르러 엄청나게 증폭된다. 대통령 권력 효과 때문이다. 인터넷을 빼고 사람 중심으로 말하자면, ‘담론이 사라진 시대’를 만든 1등 공신은 단연 노무현이다. 노무현의 뜻은 좋았을망정 전투성의 ‘의도하지 않는 결과’로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노무현에겐 나름대로 ‘해체의 철학’이 있다. 현 한국 사회가 크게 잘못됐으니 갈등과 분열을 통해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다 보면 무슨 새 질서가 만들어지지 않겠느냐는 게 그의 비전이라면 비전이다. 이런 모험주의엔 명암이 있다. 크게 흥하거나 망하거나 둘 중 하나다. 중간은 없다. 지금의 ‘바다이야기’ 사건, 더 나아가 ‘도박 공화국’ 문제는 바로 그런 모험주의의 산물이다.


△ 코드가 다르더라도 경청할 만한 고언이 있음을 인정하기만 했다면 이 나라는 도박 공화국으로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언론의 도박 공화국 비판은 오래전부터 활발했다.

누구나 수긍하겠지만, 노 정권이 ‘위기’다. 언제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느냐는 반문도 가능하겠지만, 이번 도박 공화국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노 정권의 위기를 낳은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이걸 알아야 남은 1년 반 동안이라도 잘해나갈 것 아닌가. 아무리 말을 해도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아 나 스스로 ‘담론’에 대한 정열을 잃은 지 오래지만, ‘담론이 사라진 시대’라는 칼럼에 자극받아 모처럼 부질없을지도 모를 이야길 또 해보련다.

낙관에 빠진 수많은 낙하산 예비요원들

노 정권의 위기를 낳은 가장 큰 이유를 딱 하나만 들라면 나는 ‘낙하산 인사’를 꼽겠다. 노 정권은 낙하산 인사는 ‘코드 인사’로 정당하다고 주장해왔다. 낙하산 인사에 대한 비판은 수구 기득권 세력의 발목잡기라는 식의 생각이 노 정권과 그 지지자들을 지배해왔다. 그들은 낙하산 인사와 그 정당화 논리가 노 정권을 위기로 몰아넣은 주범이라는 걸 꿈에선 생각해봤을까? 노 정권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들이 위기에 처한 이유를 아직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노 정권의 ‘낙하산 인사’에 대한 논란이 뜨겁지만, 잘 살펴보면 당파적 갈등만 두드러질 뿐 문제의 핵심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 어느 편에 더 유리하고 불리한가 하는 차원을 넘어 이 문제가 한국 사회의 현재와 미래에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우선 노 정권이 정당하다고 강변하는 낙하산 인사의 장점부터 살펴보자. 같은 ‘코드’의 인사를 선발함으로써 대통령의 노선과 정책을 일관되게 실현할 수 있다. ‘조직의 공동체화’가 이루어져 조직 이기주의에 탐닉하는 공적 조직에 외부 인사가 들어가 새로운 혁신의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다. 과거 민주화 투쟁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는 의미가 있다.

낙하산 인사의 단점은 무엇인가? 무능한 사람이 중책을 맡아 일을 그르칠 수 있다. 공직자들의 사기를 저하시킨다. 연고·정실주의의 폐해가 나타난다. 공적 조직의 독립성은 물론 조직 간 상호 견제·감시를 무력화한다. 도박사 근성을 만연시켜 자녀 교육에 좋지 않다.

그게 전부인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게 빠졌다. 그게 전부라면 장점과 단점의 무게가 비슷하니 낙하산 인사를 크게 비난해야 할 이유가 없다. 낙하산 인사는 수십,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이루어지며 낙하산 인사를 기대하는 잠재 세력은 훨씬 더 많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노 정권 지지자들은 이 나라의 개혁세력을 대변했다. 노 정권이 잘못 나가면 그들이 먼저 비판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 중 발언권이 제법 있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낙하산을 타고 한자리해보고 싶어했다. 그들은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싶어서라는 이유를 댔다. 좋다. 그 말을 그대로 믿자. 문제는 낙하산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들이 노 정권에 대한 비판을 완전히 포기하고 낙관적 사고에만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낙하산 인사가 내부 비판의 숨통을 끊어놓은 주범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역대 정권들에서도 똑같이 일어난 일이지만, 유난히 ‘코드’를 강조한데다 도덕적 우월감으로 인해 비판을 수용하는 데에 인색했던 노 정권에 이르러 최악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코드는 원래의 선의와는 달리 노 정권의 자폐성만을 키웠다. 아무리 같은 코드가 아니더라도 경청할 만한 고언이 있음을 인정하기만 했다면 이 나라를 도박 공화국으로 만드는 기막힌 일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노 정권의 주장과는 달리 언론의 도박 공화국 비판은 오래전부터 왕성하게 이루어져왔기에 하는 말이다.

잘 살펴보라. 과거 입바른 소리 잘하기로 유명했던 개혁파 인사들 중 어디 한자리 안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있긴 있지만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드물다. 한자리한 분들에 대한 폄하로 읽힐까봐 두렵다. 집합적 차원에서 이야기하다 보면 저지를 수밖에 없는 결례로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리며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우리는 그간 개혁 인사들이 요직에 많이 들어가야 개혁이 된다고 믿어왔다. 이거 다시 생각해보자. 감투 욕심이 판단을 그르치더라는 걸 원없이 보지 않았는가. 감투에 대한 미련이 사라져야 소통이 가능해진다.

전관예우가 감투 욕심을 부풀리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게 ‘전관예우’ 때문이다. 전관예우는 법조계나 행정 분야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돼 있는 고질병이자 유전병이다. 한국인들, 감투 무지하게 좋아한다. 무덤에까지 끌고 가 묘비에 새겨놓을 정도다. 호칭법도 특이해 이미 그만둔 사람인데도 꼭 벼슬 이름을 불러준다. 한번 ‘장관’이면 영원한 ‘장관’이다. 우리는 고위공직을 지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일을 잘했는지를 따지지 않는다. ‘장관’이니 ‘국회의원’이니 하는 벼슬을 했다는 자체가 중요하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을 때 큰 과오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기업이나 대학에서 스카우트하려고 안달한다. 고위직에 있을 때 만든 ‘인맥’ 덕을 보겠다는 계산 때문이다.


△ 노 정권 지지자들은 이 나라의 개혁세력을 대변했다. 그런데 낙하산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들이 노 정권에 대한 비판을 완전히 포기하고 낙관적 사고에만 빠져들었다. 사진은 국정홍보처의 국정브리핑 홈페이지.

어느 정권에서 벼슬을 했건 그 벼슬은 영원하다. 정권에 대한 평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게 바로 한국 사회다. 낙하산 인사를 창궐하게 만든 건 정권만이 아니다. 국민도 공범으로 가담하고 있다. 만약 한국 사회가 일을 잘못한 고위 공직자를 퇴임 뒤 응징은 못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준다면 지금처럼 낙하산 타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수도 크게 줄 것이다. 대학교수들부터 무슨 자리 주면 덥석 받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엔 그게 없다. 벼슬을 했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아니 설마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하고 깜짝 놀랄 정도로 감투에 집착해 로비를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 욕심엔 진보·보수의 구분이 없고, 오히려 ‘진보’를 내세워 자기가 애국하겠다고 더 치열한 전투성마저 보이는 사람들도 많다.

벼슬에 욕심을 부리지 않을망정 그걸 기대하는 정도의 마음만 갖고 있어도 세상 사는 자세와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지게 돼 있다. 이게 지금 내가 말하려는 주장의 핵심이다. 내가 보기엔 노 정권이 100% 잘못한 일이었는데도, 낙하산 예비 요원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조·중·동’이 비판했기 때문에 노 정권이 옳다는 식의 논리까지 등장하곤 했다. <한겨레>가 비판하면 “<한겨레>가 오해 안 받으려고 괜한 비판을 한다”는 답이 준비돼 있다. 노 정권은 무슨 일을 하든 무조건 옳은 것이다! 왜? 내가 타야 할 낙하산을 그쪽이 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게 그만 노 정권이 빠진 ‘낙하산’ 함정이 되고 말았다.

낙하산 인사도 문제지만 낙하산 인사에 대한 비판도 대부분 정직하지 않다. 여야 모두 쇼를 하고 있다. 나는 언젠가 차라리 ‘낙하산 실명제’를 하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그 제안의 요점은 앞으로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낙하산 인사는 피할 수 없는 숙명임을 인정하는 선에서 정직한 논의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낙하산 요원들의 실명을 정권 초기에 미리 고시해 지지자들에게 헛된 기대를 갖지 않게끔 하면 내부 비판이 살아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뜻에서 해본 생각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통령 후보급 되는 인사들의 주변엔 수십,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아예 자신의 생업을 포기하고 ‘올인’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순수한 자원봉사자가 아니다. 설사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런 일을 한다 하더라도 이들은 나중에 다시 국가와 민족을 내세워 자신이 요직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할 게 틀림없다. 이게 바로 정치요, 앞으로 영원히 낙하산 인사가 없어질 수 없는 이유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조폭 사업’과 비슷하다. 이 구역의 안전을 우리가 지켜줬으니 업소에서 돈을 뜯어가는 건 당연하다는 거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으니 우리가 ‘출세’하는 건 당연하다는 거나 다를 게 없다. 전자는 불법이요 후자는 합법이라는 반론은 무력하다. 불법을 저질러 권력을 잡은 다음에 불법 저지른 사람을 사면해주면 되는 거다.

왜 정권 말기에 온갖 문제와 비판이 터져나오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낙하산 인사가 끝났기 때문이다. 낙하산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면 이성이 살아나고 비판적 의식마저 활기를 되찾는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선 늘 어떤 문제든 썩어 문드러지고 곪아 터져야 비로소 큰 이슈로 부각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언제까지 재미없는 쇼를 인내해야 하나

앞으로 개혁파 인사들은 자신의 진로를 분명히 하자. 꼭 한자리해야겠다면 그걸 드러내자. 그래야 자신이 점하는 사회적 위치에 대한 ‘기회비용’을 줄일 수 있다. 지금 이 나라가 안고 있는 최대의 문제는 ‘진보-보수’ ‘개혁-반개혁’ 따위의 갈등 구도가 아니다. 어느 쪽이건 벼슬을 탐내는 유전자가 문제다. 그 유전자 때문에 한국 사회엔 무책임이 번성하고 자기 교정 기능이 사라진 것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지겨울 정도로 똑같이 반복되는 이 재미없는 쇼를 인내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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