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 중용…
옛날 선비들이 밥벌이는 아내에게 맡기고 골방에서 ‘열독’하던 책?
하지만, 쾌쾌한 냄새가 날 것은 이 책은 왠지 묘한 궁금증을 준다.
취업을 위해서는 영어 점수가 있어야 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는 재테크와 자기계발을 강요 당하는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도 궁금했지만, 저자가 이현주 ‘목사’라는 점이 더 흥미로웠다.

서양 종교가가 동양의 유학자들이 수 백년 전에 읽던 책을 21세기 요즘에 출판하다니, 동서고금을 크로스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오직 진리인 ‘기독교’적인 믿음을 어떻게 유지하면서 이 책을 썼을까… 혹시 대학, 중용으로 포교하려는 ‘흑심’이 담겨 있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으로 책을 집어 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전에 아는 사람에게서 불교 유적에서 발췌한 ‘예수’ 비슷한 한자로 이 땅에서의 기독교의 역사성을 발견해내는 ‘놀라운 노력’을 본적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학문과 종교, 동서양을 아우르는 통섭적 지혜가 엿보이는 책이다. 진정한 구도가의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저자는 종교적 영역의 한계를 극복하고 선인들의 가르침을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권위에 오만하고, 진리에 겸손한 자세는 성숙한 인간의 표본이며, 진리를 탐구하는 지식인의 참된 모습을 보여준다. 선인들의 가르침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현재에 얼마만큼의 ‘실효성’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과 사회를 관통하는 근원의 근원을 탐구하여 얻은 진리가 자본주의적 가치와 비교될 수 있을까? 절대로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으며,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얼마 전에 인문학의 위기라고 걱정하는 학자들이 사회면을 장식한 적이 있었다. 사회의 요구는 점점 집요하게 화폐적 가치로 환원할 수 있는 것과 그것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구조화 시킬 수 있는가에만 역점을 두려고 한다 . 투자한 만큼 뽑아낼 수 있는 것만을 대접하는 이 시대에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자본주의의 잣대는 세상을 막무가내로 저울질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그러한 요구에 맞춰 대학이 학문을 하는 곳이 아니라, 취업훈련소로 스스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의 완성이 ‘대학진학률’이라면 대학의 완성은 ‘취업률’이다. 어떤이가 주장하길, 민주-자본주의사회라는 외부의 환경에 적응하는 과도기적 단계이고, 경쟁력 강화만이 살길이라고 했는데, 인문학의 경쟁력이란 무엇일까. 제대로 된 인재를 양성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은 ‘경제성장의 기여도’가 우승열패의 운명을 가르고 마는 것인가.
 
집중과 선택의 결과로써 쓸모 없는 것들은 넘쳐나게 되었다. 단기성 효과와 ‘쓸모’라는 명제 앞에 무시되어 온 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가 된 것 같다. 한자어가 많이 나온 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내용-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진짜 어려운 것은 그것을 체화하고 삶에 흡수하는 것일 것이다.
'무엇을 해야하는가'가 화두인 시대에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책.
저자의 성숙한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고, 그의 깨달음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과정 또한 참되다.
대학, 중용을 읽고서도 ‘대학’ 갈 수 있다면, 취업할 수 있다면 해방된 인간, 확장하는 인간으로써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작년부터 이 나무를 관찰했다.
유난히 잎이 없었던 나무. 
그래도 여름인데, 초록으로 물들겠지 하는 바람으로 이번 여름을 기대했건만...
여전히 잎사귀는 희한하게도 일부에서만 자라나고 있었다.

문제는 뿌리다.

세상의 문제라면  그 근본은 개인에게 있다.
대학 중용은 그런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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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8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6-09-28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거 맨날 햇갈려요... ㅠㅠ;

저 나무.. 제가 좀 이상하게 찍어서 잘 안나왔는데요. 실제로 보면 가지가 쫙 펼쳐진 것이 너무 예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