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마빡이>는 치밀하게 계산된 각본과 계획에 맞춰 진행되는 코미디다. |
<마빡이>가 떴다. 개그콘서트의 한 꼭지로 등장한지 3주 만에 언론의 조명을 한 몸에 받게 된 거다. 방영된 횟수가 고작 세 번인데 놀라운 인기몰이다. 굳이 인기비결을 분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의 관심은 <마빡이>의 열광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적 원인에 있다.
<마빡이>에 대한 찬사는 어렵지 않게 여러 매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 시사주간지까지 이에 대한 긍정적 분석을 게재할 정도다. 일부에서 이 프로그램을 일러 ‘슬랩스틱’이라고 하는데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마빡이>는 과장된 폭력의 제스처를 보여주는 과장법적 코미디가 아니다. 보기에 어설프고 덤벙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슬랩스틱은 치밀하게 계산된 각본과 계획에 맞춰 진행되는 코미디다. 그래야 손발을 척척 맞춰 극을 진행할 수가 있다. 이런 슬랩스틱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르가 홍콩의 배우이자 감독인 성룡의 영화들이다. 코미디 장르는 아니지만 프로레슬링도 엄밀히 말하면 슬랩스틱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특별한 각본 없이 진행되는 <마빡이>를 슬랩스틱으로 보는 건 여러모로 무리다.
그렇다면 과연 <마빡이>는 기존의 장르 규칙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코미디인가? 슬랩스틱도 아니고 이른바 ‘개그’라고 불리는 여타의 만담과 구분되는 그 무엇이 <마빡이>에게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이 코미디는 지금까지 개그콘서트를 지탱해온 요소들을 전혀 포기하지 않는다. 이 핵심적 요소들은 대개 특정인의 외모를 중심으로 한 것들이다. ‘정종철’이라는 특정한 개인이 없다면 이 코미디는 불가능하다.
흥미로운 건 이 코미디가 코미디 자체에 대한 코미디라는 사실이다. 코미디에 대해 말하는 코미디라는 뜻이다. 출연자들은 “개그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 사실 때문에 <마빡이>는 희극적 효과를 발휘한다. 개그가 없는 개그라는 말은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는 말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한마디로 하나마나한 소리라는 거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마빡이>는 “분석”도 피해 달아난다. 이들은 “이 개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한다는 건데 이건 진지함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 그러나 진지함을 조롱하는 것도 엄연히 말해서 일종의 의미다.
열심히 손으로 이마를 치는 마빡이는 웃는 관객들을 향해 “이게 재미있어 보이냐”고 호통을 친다. 출연자에게 힘든 일이 관객에게는 웃음거리가 된다. 이건 웃음을 만들어내는 기본 구도다. 일부에서 이걸 두고 자학적이라고 말하지만, 웃음은 어느 정도 자기 파괴에서 출발한다. 강고한 자아의 환상을 무너뜨리는 그 지점에서 웃음이 발생한다. 웃음이 진리를 드러내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
<마빡이>가 드러내는 진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이기도 하다. | <마빡이>에서 중요한 건 이런 인기를 구가하게 된 코미디의 형식적 비밀이 아니다. 이 코미디의 형식은 과거의 것을 적절하게 재포장한 것뿐이다. 굳이 정의하자면 재브랜드화 쯤 되겠다. 따라서 이 코미디의 형식 자체를 분석하는 건 출연자의 주장대로 무의미하다. <마빡이>는 형식 내적 논리보다 그 외적 구조에서 슬그머니 현실을 드러낸다. 관객의 웃음이 그 현실의 실마리다. 관객은 왜 <마빡이>를 보고 웃는가? 이 문제가 이 코미디에 대한 진짜 물음이다.
이마를 손으로 치는 출연자들을 보고 관객들은 웃는다. 극이 끝날 무렵이 되면 맨 처음 출연한 마빡이는 거의 탈진상태다. 다른 출연자들은 은근히 시간을 끌며 마빡이를 괴롭힌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등장한 출연자는 이른바 형님뻘로 지쳐 넘어진 후배 출연자들에게 진정한 개그맨에 대한 훈계를 늘어놓는다. 이런 상황에서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힘든 노동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출연자들의 곤혹감을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누구는 이걸 진정성이라고 하지만 나는 진리라고 부르고 싶다. 이게 무슨 진리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현실의 구조를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거다. 물론 이런 평가는 <마빡이>라는 코미디에 대한 가치평가가 아니다. 좋은 코미디냐 아니냐 하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마빡이>가 드러내는 진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이기도 하다. 후기자본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 세속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신화를 먹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이 신화가 설파하는 건 무한 경쟁이지만 실제로는 불평등한 경쟁에 대한 용인이다. <마빡이>는 불평등한 경쟁의 구조를 드러낸다. 마지막 훈계를 하는 출연자와 처음 이마치기를 시작한 출연자 사이에 가로놓인 차이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 경쟁의 구조에서 개그라는 엔터테인먼트 행위는 더 높은 시청률을 위한 반복적 강박으로 물화된다. 이 지점에서 개그는 더 이상 개그이기를 멈추고 개그맨의 의지를 배반하는 독립적 생명체로 거듭난다. 이래서 <마빡이>에 개그는 있되 개그맨이 없다. 개그맨은 개그를 위해 고통스럽게 이마를 칠뿐이다. 개그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는 개그맨, 이건 개그 자체에 대한 상대화이자 동시에 노동의 압박에 대한 비판이다.
<마빡이>에서 개그는 노동의 구조를 드러내는 형식이다. 우리를 웃기는 건 이렇게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노동의 구조에 대처하지 못하는 출연자의 무기력이다. 우리는 왜 이런 무기력에 분노하지 않고 웃는가? 그 이유는 이게 조롱이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한 조롱일까? 바로 근대적 노동에 대한 조롱이다. 근면성실이라는 근대적 노동의 패러다임에 대한 대중의 혐오를 이 코미디는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마빡이>는 <무한도전>과 같은 논리를 갖고 있다. 무엇인가 열심히 할 뿐 그 이유는 없다.
근대적 노동과 대별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창조성이다. 문화산업을 창조산업이라고 부르게 된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애플이나 구글의 선례들이 보여주듯, 이제 창조적 인재니 창조적 아이디어니 하는 말들은 수사적 치장만은 아니다. 후기자본주의의 생존이 달린 핵심적 현안이기도 한 거다. 창조성에 초점을 맞춘 노동시장의 순환구조는 대중에게 항상 변화에 대한 강박을 강제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강박의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한 대중의 무의식적 노력이 항상 작동하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이렇게 창조성이라는 새로운 축적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이 시대에 적응하고자 하는 대중의 열망이 <마빡이>의 인기로 이어진다.
 *이택광 문화평론가는 1968년 생으로 문화이론을 전공했다. 저서로는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2002),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2002)가 있으며 광운대학교 영어영문과 교수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