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발족한 한미FTA반대범국민서명운동본부는 특별한 의미로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명운동본부의 캐치프레이즈는 ‘12014277+1’이다. 처음에 나는 이 숫자가 뭔가 했다. 돈의 액수여도 천이백만이 넘으면 거액인데, 12014277은 사람의 수라고 한다.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찍어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숫자다.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득표수 12014277를 보며 새삼스런 통증이 지나갔다.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씨는 지금의 대통령 노무현이 아니다. 정치계에서 오래 밥 먹고 산 이들보다 그의 정치력, 행정력, 실무 능력이 탁월할 거라고 믿어 그를 뽑은 게 아니었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일종의 상징이었다. 말로는 하나같이 ‘국민을 위해!’라고 떠들어대는 숱한 정치인들의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정치사에 신물이 나버린 우리는 정말이지 민중의 소리에 진심으로 마음 기울일 수 있는 정치 지도자를 원하고 있었고, 거칠지만 순수해 보이는 노무현씨에게 그 가능성을 걸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열망이 컸으므로 배신감의 체감지표가 상대적으로 클 수도 있겠지만, 체감지표를 떠나서도 노무현 대통령의 행보는 그를 당선시킨 민중의 열망에 반한 것이었다. 이라크 파병에 이어 새만금공사 재개, 평택미군기지 확장이전, 한미 FTA 추진에 이르기까지 노무현 정부의 정책과 정책 과정은 많은 의혹과 분노 어린 시선을 받았다. 그보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나르시시즘에 가까운 자기방어기제다. 그는 언제나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중병에 걸린 듯하다. 기층 민중이 아파하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진심으로 민중을 사랑하는데 왜 민중은 자기를 사랑해주지는 않냐고 반문한다. 얼마 전 루마니아를 방문한 노 대통령이 교민 간담회에서 털어놓았다는 말을 기사로 접하면서 정말이지 실소를 넘어 참담한 느낌이 들었다.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지는 이유가 국민들의 기대 수준이 너무 높기 때문이란다. 나는 열심히 뛰고 있는데 더 뛰라고 채찍질하니 (힘들지만) 하여간 열심히 뛰어보겠단다. 앞뒤로 사족을 덧붙여놓긴 했지만 지지도 상실의 현실에 대한 그의 판단의 현주소가 이 수준이다. 귀도 눈도 모두 닫혀버린 듯한, 그의 기묘한 순교자의식이 나는 정말 끔찍하다.

애초부터 ‘정치적’이었던 인간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만, 정치가 인간의 심성을 얼마나 황폐하게 할 수 있는지 처절하게 반증하는 정점에 노무현 대통령이 서게 될 것 같아 측은하다. ‘한미관계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국민들이 많은데 약효가 그리 길게 가지는 않겠지만 이럴 때 제가 조지 부시 대통령을 만나면 한동안 조용하다. 이번에도 한미관계를 탈없이 조정하고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이 사람은 어느 다른 우주의 외교 현실을 사는 대통령인가. 국가 경영이나 외교가 그런 투정이나 로맨스 같은 발언으로 되는 것이라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현실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나라 돌아가는 꼴이 너무 끔찍해 신문 보기 두렵다는 이들이 많다. 신문 보면 욕설이 나와 홧병이 도지니 딴 얘기 하자는 이들. 요즘 술자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유명 대사가 ‘나도 그때 노무현 찍었다’이다. 그를 당선시켰던 사람들이 갖게 된 기묘한 열패감과 정치적 냉소라는 이 병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병을 깊게 만든 당사자는 여전히 자기성찰의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국민들의 희망 수준이 너무 높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말이 떠올랐다. “희망은 원래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걷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길이 되는 것이다.” 소설 <고향>에서 노신이 토로하는 희망론은 동시에 절망론이기도 하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길이 되는 그 길이 절망의 길일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이 가고 있는 길은 이전의 대통령들에게서 신물나게 보아왔던 그토록 수많은, 속칭 ‘정치 지도자’들이 닦은 전형적인 소통불가능한 길로 이미 접어든 지 오래인 듯하다. 그리고 그 길의 정점에 있는 한미FTA체결을 막아낼 수 있는 길은, 순수한 열망으로 ‘노무현’이라는 상징을 만들어냈던 12014277명의 힘으로부터 다시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냉소는 세계에 절망한 이들이 세계를 향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태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미래가 통째 걸린 한미FTA 앞에서, 새로운 정치열망의 상징을 만들어냈던 12014277명의 사람들이 동력이 되어 새로운 12014277을 창조해야 할 때가 지금이지 않을까. 상징을 넘어서는 상징을 만들기 위해선, 죽어버린 상징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 김선우/시인
정부가 밀실협약 체결하듯 쉬쉬하며 한미FTA를 밀어붙이던 때로부터 지금까지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그간 많은 공론화가 이루어졌고 공론화되어 문제제기가 많아지자 그제서야 정부는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체한다. 국민 누구도 한미FTA가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린지 모를 때로부터 출발해 ‘한미FTA 권한 쟁의 심판’을 청구하는 데까지 왔다. 비전이나 희망은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이 나라 정치 현실에 희망을 만드는 일은 많은 이들이 그 길을 걷는 것이다. 내 미래의 생활을 속속들이 간섭하고 옥죄게 될 엄청난 협정에 대해 열린 광장에서 충분히 함께 이마를 맞댄 뒤 정말이지 국민투표를 할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정치하는 놈들 다 그렇지 뭐, 라는 열패감에서 벗어나 우리 스스로 우리 현실의 주인이라는 것을 축제처럼 누릴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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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9-14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그때 노무현 찍었지 ㅡ..ㅡ;
이젠, 넌 찍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