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
허영철 지음 / 보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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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과거는 다가올 미래의 서막이다.” 세익스피어, 템페스트

우리 역사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던 적이 많았다. 대만민국의 공교육도 모자라서 사교육을 받고서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라는 것을 느꼈을 때가 그렇다. 반만년 역사는 강조하면서도 수 십년 전 역사는 감춰버리는 이 해괴한 토양 위에서 진리의 빛을 찾을 수 있을지 정말 의문스럽다. 위의 템페스트의 구절같은 ‘과거가 아닌 미래로써의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유명한 격언들은 흔하다. 그리고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 책에서 더욱 절감했다. 

“모순적이고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이면에서 진정한 동일성을 발견하고,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것 이면에서 실질적인 다양성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데, 이것은 오해 받고 있기는 해도 이념을 다루는 비평가들과 역사 발전을 다루는 역사가들에게는 가장 본질적인 재능이다.” 안토니오 그람시

37년간의 인생을 압류 당한 비전향 장기수의 삶은 우리의 현대사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미군정의 지배 아래에서 자본주의를 뼛속까지 학습하여 살아가는 우리가 바라본 현대사와 농민, 탄광 노동자, 인민위원회 위원장, 남파공작원 그리고 옥살이를 한 저자가 보고, 느끼고, 살아온 현대사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정치적 의도, 권력의 정당성, 기득권의 이익에 의한 거대 지배 담론이 대중에게 기형적으로 역사를 바라 보는 시점을 각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에 맞춰진 종속된 과거일 뿐이고, 그것은 우리가 현재를 살아감에도 굴레 같은 과거에 미래를 묶어놓은 형국인 것이다. 이러한 담론을 깨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역사, 대중과 민중에 흘렀던 역사를 끌어내야 한다.

이 책이 그러한 역할의 일부를 담당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 책에서는 ‘역사에 화려하게 장식된 인물’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탄광 노동자, 동네 이웃, 인민 동지들 같은 주변의 인물들 그러나 당당하게 민중의 역사를 구성했던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그들이 피부로 경험했던 지식과 실천이 고스란히 스며들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남한과 미국의 일방적인 시선으로 보았던 현대사를 북한의 시선과 대조하면서 느낄 수 있게 하는 편집의 묘미를 보여준다. 이 책을 빛나게 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각주에 있다.

예) 9월 노동자 총파업: 1946년 9월 23일 철도 노동조합의 파업을 시작으로 일어난 전국적인 파업. 미군정청의 운수 노동자 감원과 월급 삭감에 반발하여 전국의 노동자와 좌익계 노동조합이 총파업을 단행했다. 특히 지방에서의 파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어 남한 전역을 두 달 동안이나 불안에 떨게 했던 10-1 대구 폭동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북) 9월 총파업: 1946년 9월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그 앞잡이들의 매국매족행위를 반대하고 생존의 권리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일어난 남조선로동자들의 대규모적인 정치적 총파업,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탄압만행이 강화될수록 남조선로동자들과 인민들은 투쟁을 더욱 세차게 벌렸으며 마침내 10월에는 전인민적인 반미구국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미묘한 차이,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역사를 객관적이고 엄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비판의 힘을 불어넣어 준다.

게다가 면회기록, 서신기록, 좌익 재소자 사상 동향 카드, 장푼군 사람들 목록 같은 개인의 역사를 담은 사료에서부터 현대사를 아우르는 연표, 맥아더 포고문, 차스차코프 포고문, 삼상회의 결정서, 정전 협정문, 인민위원회 전원회의 보고서까지 독자를 배려하는 세심한 구성이 책의 가치를 높인다.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냐?” 221p

물론 읽기 편한 책은 아니다. ‘상식의 저항’을 느끼게 됨은 어쩔 수 없다.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을 찾아 볼 수 없으니까.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당신이 동경하는 지금 북한을 보라. 당신들의 이상 사회가 과연 맞는가? 인간의 존엄과 권리가 사라진 곳을 남한과 비교할 수 있을까? 최소한 남한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은가?’

개인의 가치를 존중 받지 못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먹을 것은 풍족해도 돈이 없으면 굶어야 하고, 1950년대 전쟁 같은 투쟁을 생활 속에서 치뤄야 한다는 점. 그것으로 인한 정신적 피로와 물질적 빈곤감은 삶의 만족도를 최저로 떨어뜨리고, 사상의 자유가 없어서 37년간 수감시키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감옥에서 썩어야만 하는 이 사회가 과연 북한 체제보다 우월한가… 굶어죽는 숫자는 훨씬 적으니 나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북한이건 남한이건 벗어나야 할 사회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려워도 정책을 집행할 때는 반드시 민주적인 방법으로 회의를 통해서 결정했어.  ~ 어떤 사업이든 다 그렇게 사전에 충분히 설명한 후에 실무를 집행하니까 정책을 모두 무리 없이 받아들여, 나는 그것이야말로 정책 집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봤어.” 199p

아니 오히려 저자가 살았던 시기보다 민주적 절차는 퇴보했는지도 모르겠다. 대중과의 합의는 사라진 지가 오래다.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정책들 얼마나 많은가. FTA, 평택, 한미군사협졍 관련, 노사 관련, 사회, 경제, 교육 모든 분야에서 정부의 횡포는 극에 달하지 않던가.

“천명은 사람이 고칠 수가 없어요. 하늘이 내린 명이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사람이 고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게 바로 ‘혁명(革命)이에요, 여기서 혁은 사람의 손질이 가해진 가죽을 뜻해요. 자연 그대로의 가죽 피(皮)와 다르지요. 곧 천명을 손질할 수 있다, 천명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혁명인 겁니다.” 276p

이 시점에서 저자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혁명’.
민중에 의해 사회 변혁을 이끌어내야 한다.

“처음부터 혁명가로 태어나서 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가이기를 선택하고 노력하는 것이에요.” 118p

이 책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스스로의 역량을 믿고 움직이는 것이다.
집단적인 기억, 역사, 상상력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민주적 공동체, 이상사회로 이끄는 초석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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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8-19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보고 이 책일 것 같았어요^^편집인들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었답니다. 좋은 책이었어요^^

라주미힌 2006-08-19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집이 훌륭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