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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16’이라는 숫자를 놓고 수많은 사람들이 떠들썩거린 지가 얼마 안 되는데, 다시 사람들은 ‘1천만’이라는 숫자를 놓고 다시 떠들썩댄다. 군사문화와 산업화의 시대를 거치며 ‘한국 최고’나 ‘동양 최대’나 ‘세계 제일’ 따위의 첫째를 한창 숭배하던 국민이 이제는 큰 숫자에 도취되어 거대한 집단을 이루어 함성지르기를 좋아한다.

한국영화가 엄청난 관객을 동원했다는 숫자적 성취는 얼마전부터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기준으로 당당하게 동원되기도 했다. 하지만 몇몇 영화가 1천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사실이 우리 영상문화의 이상적이고 질적인 발전을 과연 논리적으로 증빙하는가? ‘16강’에도 오르지 못한 축구를 위해 소모한 국민총체적 정력이 과연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얼마나 기여했느냐는 의구심과 더불어 큰 숫자에 환호하는 군중심리 또한 우리의 문화적 건강성에 대한 의구심을 은근히 자극한다.

관객동원 1천만시대로 접어들 무렵부터 문화의 획일화와 편식 성향을 걱정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한국 사회의 쏠림현상은 사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가시화했다는 생각이다. 이념전쟁과 패거리짓기 정치가 국민을 계속해서 가축처럼 여러 울타리로 가두어놓는 과정에서 군사정권이 우민정책을 위해 체육을 진흥했다는 견해도 한때 만만치 않았지만, 이제는 국민 전체가 스스로 울타리 안으로 몰려 들어가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축구와 야구뿐 아니라 권투에 이르기까지 체육에 대해서 관심이 퍽 많았던 필자(한때 신문사에서 문화체육부장도 지냈음)가 거의 병적이라고 여겨질 지경의 사회적인 쏠림현상을 보고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부터였다고 생각한다. 몇 달씩이나 모든 텔레비전 방송이 올림픽 얘기만 반복하는 집단고문과 세뇌작업은 견디기 힘들었고, 과다한 국가 홍보에 질려 결국 체육행사 전반에 대한 역겨움을 느끼게 된 소수파 한국인은 필자 이외에도 또 있었으리라는 짐작이다.

그런 쏠림현상이 이제는 영상문화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수많은 극장을 소수의 영화가 독점하는 공격적이고 폭군적인 배급 전략은 건강한 성장이라기보다는 병적인 문화비만증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영화에서는 예술성보다 대중문화로서의 기호(嗜好 및 記號)가 훨씬 더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한다는 본질은 상식이라고 하겠지만, 흥행에서의 성공을 크기와 규모와 숫자만으로 측정하려는 인식은 좀처럼 문화예술의 성장을 가늠하는 올바른 시각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FTA의 식민통치 방식과 할리우드 영화의 세계제패는 석권과 정복으로 점철된 서양 역사의 연장선상에 놓이며, 소수에 의한 다수의 종속화 또한 범세계적인 현상이다. 소수에 의한 시장의 독점은 사회주의 혁명을 간접적으로 촉발시키기도 했고, 지금도 사람들은 재벌의 횡포와 공평한 분배, 사회정의를 열심히 얘기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이제 숫자를 놓고 떠들썩하게 좋아하지만 말고, 열광하는 함성과 환호의 휘저음에 익사하기 전에, 집단 백치화를 일으키는 문화비만증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큰 숫자로 성공한 소수가 힘없는 다수를 지배하는 사회라면, 그것은 예술적 다양성을 고사시키는 풍토이다. 생활의 편리함을 도모한다면서 기계가 인간의 사고를 대신하는 단순화 작업은 소수의 지배자가 다수를 우민화하여 사회를 전체적으로 퇴화시키는 현상이다. 군중심리와 집단사고의 계수를 놓고 발전의 척도로 삼는 행위란 그래서 위험한 짓이다. 생각하는 소수가 귀족화하는 한편 다수가 우민이 되기 때문이다.

1천만이 l년에 한 편의 영화를 보는 사회보다는 10만씩 골고루 분포한 관객이 저마다 100편의 영화를 보는 사회가 훨씬 예술적이다. 이런 문화선진화는 관객이 기여해야 하는 몫이다.

그리고 영화예술인들에게도 해야 할 일의 몫이 따로 있다고 여겨진다. 흥미진진한 할리우드적 대규모 구경거리도 좋지만, 한국적 기호가 담긴 예술의 언어가 다양한 표현으로 이루어져야 읽기의 깊이와 맛이 생겨난다. 전투적이고 우렁찬 함성은 과거의 산물이다. 큰 목소리로 진폭을 높이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소리만 질러대면 발언자의 목청이 상하고 듣는이의 귀청도 상한다. 크고 작은 속삭임으로 마음을 감동시키는 화법이 아쉽다. 특수효과와 기술은 예술을 창조하는 수단이어야 하며, 희한한 구경거리만으로 눈을 즐겁게 하는 기술은 마음과 머리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영화가 기술과 자금과 판매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수준의 국제경쟁력을 갖추었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 사실이다. 이제는 어떻게 얘기하느냐 하는 기술적인 차원은 어느 정도 자만해도 될 만한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무엇을 얘기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우리 영화가 상영일수와 극장확보를 걱정하는 이유란 따지고 보면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설득할 한국적 영상화법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안정효/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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