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혁명과 귀고리, 그리고 누드모델

문화대혁명때 동료의 밀고로 감옥에서 17년을 보낸 장따예의 기구한 사연…부모를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던 어느 여의사의 이야기도 상상을 초월

▣ 베이징=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2003년 1월17일로 기억한다. 장따예(따예는 할아버지라는 뜻)는 베이징의 낡고 오래된 후통(골목) 길가에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긴 백발 머리와 머리만큼이나 길고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그의 표정은 한없이 쓸쓸하고 무료해 보였다. 옆으로 다가가 반가운 웃음을 건네자 장따예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그러고는 다 빠져서 이가 하나도 없는 잇속을 드러내며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따예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무심코 거울 속에서 모델의 길을 찾다

그의 첫인상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낀 건, 칠순을 넘긴 ‘꼬부랑’ 할아버지가 양쪽 귀에 커다란 링 귀고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귀고리에 얽힌 사연을 듣다 보니 그의 ‘남다른’ 과거가 자연스레 들춰졌다.


△ 동료의 밀고로 17년을 감옥에서 보낸 장따예. 그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것은 ‘인간성에 대한 혐오’였다.(사진/ 박현숙 기자)

장따예는 문혁이 막 끝나갈 무렵인 1976년 ‘반혁명죄’로 붙잡혀 1993년 출옥할 때까지 무려 17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무시무시한 ‘반혁명죄’는 실은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 비롯됐다. 당시 베이징 교외의 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어느 날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다 “마오쩌둥이 류샤오치를 박해·타도한 일은 잘못된 것이며, 문화대혁명도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말했다. 며칠 뒤, 자신이 근무하던 학교에 장따예를 ‘인민의 적’으로 고발하는 비판 대자보가 붙었다. 같이 잡담을 나누던 동료가 밀고를 한 것이다.

장따예는 문혁 이전인 1957년 반우파 투쟁 당시에도 ‘우파분자’로 몰려 7년 동안 농촌으로 보내져 ‘노동개조’ 교육을 받았다. 평소에도 ‘바른말’ 하기를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세치 혀’로 인한 화를 많이 입었지만, ‘반혁명 분자’로 몰리면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뒤흔들렸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부인과도 이혼을 했다고 했다.

17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 장따예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일은 바로 ‘인간성에 대한 혐오’였다. 동료의 밀고로 반혁명 분자가 된 것도 그렇지만, 감옥 안에서 그를 괴롭히는 무수한 ‘잡배’들을 대하면서 장따예는 인간에 대한 철저한 절망과 분노를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때 가장 큰 소원이 있었다면 “나쁜 놈들을 모조리 때려 죽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보다 그 ‘나쁜 놈들’과 매일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미치고 두려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영원히 감옥 안에서 정지된 줄로만 알았던 시간은 그래도 흘러 흘러서 드디어 출옥을 할 수 있게 됐다. 출옥을 한 뒤 장따예는 예전에 살던 후통으로 돌아왔다. 1976년 이후 바깥세상에 처음 나와본 장따예는 1993년 당시 베이징 길거리와 사람들의 변화한 모습을 보고 한동안 넋이 나갔다고 한다. 그 뒤 얼마 동안은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자신은 여전히 1976년에 머물러 있는데 세상은 그동안 천지개벽을 했으니 그 심정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 뒤 장따예가 ‘먹고살기 위해서’ 시작한 일은 미술대학 누드모델이다. 감옥에서 나온 뒤 앞으로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어느 날, 무심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다가 ‘모델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그 뒤 장따예는 직접 자신이 쓴 모델 추천서를 들고 각 대학교를 찾아다니며 모델 ‘구직활동’을 했고, 다행히 몇 군데 대학에서 연락이 오면서 지금까지 꾸준히 모델 일을 해오고 있다.

자살을 막아준 링 귀고리의 꿈

처음 만났을 당시 장따예가 귀에 걸고 있던 링 귀고리에 관한 사연은 이렇다. 2001년 어느 날 혼자서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가 문득 귀고리를 해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남자들도 귀고리 하지 말란 법 있나.” 자기 외모에 커다란 링 귀고리를 하면 더 ‘예술적으로’ 보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단다. 앞으로 살 날도 얼마 안 남았고, 옛날 문혁 시절과 다른 세상이니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은 최대한 다 ‘실천’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 ‘흑색분자를 척결하라!’ 문혁 당시 만연했던 비판투쟁장의 모습. ‘반혁명분자’로 몰린 사람이 기다란 고깔모자를 쓴 채 곤욕을 치르고 있다.

장따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평등한 관계’와 서로를 억압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이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17년간 반혁명 분자로 감옥에서 보내는 동안 자신이 자살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언젠가는 귀고리도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을 거라고도 했다. 헤어질 무렵 그는 주소와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주면서 그 뒷면에 “인생에 대해 논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썼다.

지금 장따예가 살던 후통은 지난해 철거되고 없어졌다. 지난해를 마지막으로 장따예와의 연락도 끊어졌다. 장따예는 링 귀고리를 하고 여전히 미술대학 누드모델 일을 하고 있을까. 일이 없을 때는 대낮의 무료함을 견디기 위해 혼자 독한 술을 훌쩍인다는 장따예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중국에는 수많은 장따예들이 있다. 그들이 거쳐온 삶의 행로는 과거 중국의 ‘정치시대’를 반영하는 자화상이다. 1957년 반우파 투쟁을 기점으로 1976년 문혁이 끝날 때까지 중국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가 실종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삶을 감내해야 했다. 가장 ‘혁명적인 것’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40년 전 중국에서 벌어진 문혁은 가장 ‘비인간적인’ 혁명이었다.

중국의 기록문학 작가 펑진차이는 <100사람의 10년>이란 책에서 그 ‘비인간성’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100사람의 10년>은 문혁을 겪었던 보통 중국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취재·기록한 구술문학집이다. 장따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책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혁 구술담을 절대 100% 믿지 않았을 것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구술담 가운데 특히 잊혀지지 않는 얘기가 있다. 1966년 문혁 당시 서른 살이었던 한 아동병원 여의사의 사연이다. 그는 홍위병들에게 ‘인민의 적’으로 찍혀 매일같이 고문과 고통을 당하는 부모를 직접 ‘죽였다’. 부모의 간청 때문이었다. 그들 세 가족은 홍위병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함께 죽기로 결정했다. 부모는 의사인 딸에게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동맥을 끊어달라고 했고, 그 다음에 자살하라고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의 동맥을 막 끊었을 때, 사람들에게 발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구술을 끝내며 이렇게 물었다. “세월이 지난 뒤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이렇게 말해요. ‘너는 잘 살아야 해. 그래야만 죽은 네 부모님 볼 면목이 있는 거야’라고요. 정말 내가 잘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건가요?”

‘100사람의 10년’은 계속되고 있다

펑진차이는 책 서문에서 “20세기 인류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두 가지다. 파시스트의 만행과 문화대혁명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아직도 비극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다. 온전히 그것을 마주 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비극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방법은 “숨기고 잊어버리거나 또는 일부러 모른 체하는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되돌아보고 투명하게 밝혀내는 것”이란 게 그의 지적이다. 그가 책을 낸 것은 10년 전 문혁 발발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또다시 10년이 지났다. 문혁 40주년을 맞는 오늘 중국에서 ‘100사람의 10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http://www.hani.co.kr/section-021005000/2006/05/0210050002006052506110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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