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씨날코 - 1959년 이기붕家의 선물 꾸러미
김진송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2월 25일, 빨간 모자 아저씨가 커다란 선물 꾸러미를 들고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선물을 나누어 준다. 아름답게 보이는 이 연례행사를 약간 변형하고 싶어진다. 만약 1년 내내 빨간 모자 아저씨의 집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에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바친다면,

그것은 선물일까?

어느 신문사에서 종이 뭉치가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이름과 물품 목록이 적혀있었다. 이기붕의 집에서 나온 것으로 매일 같이 많게는 하루에도 수백여명이 흔적을 남긴 방명록이면서 장부의 성격이 담긴 꾸러미였다. 그 물품 목록을 살펴 보면 백화점 진열대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갈비, 생선, 과일, 코카콜라 한 상자, 씨날코, 휘발유 세 드럼, 포플린 세 필, 아이스크림 세 통, 병아리 세 마리, 이불, 새우젓, 소금, 장미, 십자매, 진돗개, 빈대떡, 만둣국, 게장, 간장, 뎀뿌라, 꿩, 노루, 우장춘 박사가 보낸 '씨 없는 수박 세 통 등' 80p

사과박스, 차떼기, 트럭정도는 되어야 하는 요즘의 상황과 비교되게 당대 최고의 세도가의 집에 들어오는 물품 목록은 매우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이승만은 군림하고 있었으며 이기붕은 통치하고 있었다. 군림하는 대통령과 통치하는 이기붕은 자식마저 주고받는 근친교배의 과정을 거쳐 생성된 자웅동체였다.” 268p

그렇다면 선물일까?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는 선물 경제는 시장 경제와 나란히 존속했으며 상호 보완적이라고 주장한다. 선물은 세계시장이 발달했어도 비 시장관계가 중요한 사회적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인데, 그 관계는 역시 권력과 자본의 사적 소유를 위한 목적성을 띄고 있는 것이다.
“부정과 부패와 횡령과 사기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권력의 주변에 있던 선택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짓은 적어도 돈과 물자 있는 곳 근처에 얼쩡거릴 수 있는 특권이 있어야 저지를 수 있는 범죄들이었다.
권력의 근처에 얼쩡거리지 않으면 도무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29p

그래서 뇌물일까?

황당하게도 저자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책의 의도가 아마도 그것을 밝히는 것이 아닌가 기대했던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사회적 정황으로 봐서는 선물로 보기 어렵고, 뇌물로 보자면 너무 보잘 것이 없다라는 것, 심적으로는 의심이 가는데 증거로는 불충분한 종이뭉치 일뿐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제목처럼 선물로서의 ‘장미’와 뇌물로서의 ‘씨날코’의 경계가 모호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저자가 밝히길, “이 문서가 의미가 있다면 바로 권력을 사유화하는 공식 장소의 출입자와 물품의 출납이 기록되어 있는 자료라는 것이며,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서 권력을 사유화하는 방법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기붕의 집은 권력을 사유화하는 공적인 장소였던 셈이다. " 40p

물품 자체의 의미는 중요했던 것이 아니다. 그 물건들이 어떤 경로로 누구에게 어떤 의미로 전해지는가를 살펴 봄으로써 공적 영역의 정치가 끊임없이 사적 영역을 침범하는 과정을 발견해 낸 것이 커다란 수확인 셈이다. 사유화 된 권력이 재생산되고 있었던 당대의 풍경은 말한다. 1959년 이기붕의 집은 한국의 무능과 부패를 일삼던 정치 부라퀴들의 이합과 집산이 곰비임비 이루어지고 있었던 허브(Hub)였고, 그것은 역사의 순간에 머물지 않는 연속성과 지속성을 갖춘 권력의 단면임을 일깨워 준다.

“모든 것은 권력으로 집중되어버렸다.” 315p
"전쟁이 끝난 후 모두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있었고 누구는 '있다'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뭐든게 궁핍했다던 그 때에도 물자의 배분 문제 여전했다.” 142p
무능과 부패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는 권력과 물자의 집중화에 그 원인이 있다.
배분의 불평등, 권력의 집중화, 전쟁과 반공이데올로기가 만든 일상의 폭력, 정치의 부패와 정부의 무능이 불러온 사회적 현상들은 신기하게도 과거와 현재를 오버랩시킨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이 꼬여버린 것일까. 어떻게 과거와 현실이 똑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다면 역사로부터 응징을 받는다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과거의 야만은 득이 되면 받아들이고, 실이 되면 거부하는 단순한 논리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토론과 논쟁과 조정의 절차는 매우 낯선 일이었다. 이로우면 밀어붙이고 해가 되면 저지하는 야만적 절차에 수십 년 동안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정치란 매우 단순한 노동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야만이 오늘 똑같이 보여주는 논리이다. 현재의 그들에게서 50년 전 과거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292p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행운’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들이 보았고, 우리가 보고 있고, 누군가가 보게 될 익숙한 역사는 여전히 증기를 내뿜으며 달리고 있다. 어이없이 ‘침목’이 되어야만 했던 사람들, 우리가 ‘침묵’하는 사람들, 현대사는 그렇게 달리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