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네 권

데이비드 크리스털(지음), 권루시안(옮김), <<언어의 죽음>>, 이론과실천, 2005.
다니엘 네틀/ 수잔 로메인(지음), 김정화(옮김), <<사라져가는 목소리들>>, 이제이북스, 2003 초판 1쇄, 2006 초판 2쇄.

두 권의 책 모두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언어의 소멸을 다루고 있으나 그 범위는 다르다. 데이비드 크리스털의 책은 '언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언어의 죽음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언어는 왜 죽는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목차 구성을 보아도 언어 그 자체에 머무르고 있음이 확연한 반면, 뒤의 것은 언어는 물론이고 그것과 연결된 생태 세계까지도 자신의 범위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화로서의 언어, 인간 존재의 일부로서의 언어에서 생태계와 환경보존으로, 토착어와 지배적인 국제어들의 관계에서 정치.사회.경제적 요소들에 의해 형성되는 구도로, 신석기 농업혁명과 유라시아 세력의 확산 및 신세계의 식민화에서 선진국 주도의 경제개발과 그 파장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문화-언어적 다원주의에서 농촌의 보호와 발전 및 지속가능한 개발까지 그 범위는 전 지구적이어서 대이론을 즐기는 심성을 충족시켜주나 그 논증의 치밀함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다.


폴 비릴리오(지음), 이재원(옮김), <<속도와 정치>>, 그린비, 2004.
배영달(옮김), <<정보과학의 폭탄>>, 울력, 2002.

우리는 책이 보편적 상황에서 쓰여지고 독자 일반을 대상으로 하며 보편언명으로 가득차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오히려 저자는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독자를 향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책을 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세팅을 찾아보는 것이 어쩌면 책의 이해에 요구되는 필수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이는 넓은 의미로는 콘텍스트에 속하지만 정확하게는 개별적 세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좀처럼 변화하지 않고 지속되는 시대정신을 공유하였다고 믿어지는 과거의 저자들과는 달리 현대의 저작에서 더욱 더 긴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현대의 저자들은 '현대'라는 동일한 상황 속에 처해있는 듯하나 각각이 받아들이고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핵심 부위는 각자 다르다. 저자의 처지, 책에 대한 태도, 구체적인 목표 또한 아주 다르다. 거기에 덧붙여 책이 하나의 상품으로서 만들어지는 상황에서는 독자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더욱 많아진다. 독자를 감안한 -- 엄밀하게는 판매를 계산한 -- 출판사의 요구, 편집자의 개입이 책 어딘가에 분명히 들어있을 것이지만 그 모든 것은 저자의 이름 아래 감추어 있기 때문에 어떤 책을 들었을때에는 '과연 이 책이 온전하게 철두철미 저자의 노고의 산물인가'에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내가 이러한 의문을 떠올린 것은 비릴리오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individual setting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비릴리오가 자신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당대'와 '사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또는 그가 은둔하고 있다는 프랑스 서부의 항구 도시 라로셀, 그리고 그가 교수로 재직하였던 파리의 건축전문학교에서의 경험들은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것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 이러한 궁금증은 연예인에 대한 호기심과 비슷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의 저작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1932년 생인 그의 삶과 그것으로부터 길어 올려진 그의 이론을 "히틀러가 낳은 전격전의 아이"라는 말로 압축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일까, 더 나아가 당대의 사회에 밀착해 있는 그의 이론들은 그의 이론을 낳아놓은 토대로 추측되는 그의 경험들 -- 전격전, 68혁명 등 -- 을 전혀 공유하고 있지 않은 한국의 독자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아니 이해될 수조차 있는가,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속도와 정치>>의 번역자가 시도하고 있는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과 비릴리오의 저서를 비교해" 보려는 것은 두 저작의 저자들 모두의 individual setting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일종의 지적 폭력 또는 지적 어거지는 아닐까? 쓸데없어 보이는 생각이다.

논증을 시도하고 있지 않은 <<속도와 정치>>의 내용 자체의 이해를 위해서는 앞 부분에 붙어있는 존 아미티지의 서문 "폴 비릴리오의 정치이론"을 읽어 정리한 뒤, 그것을 비릴리오의 본문 내용과 대조해 보아야 하나 내게는 진척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아 아미티지는 비릴리오 이해의 비밀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까닭에 아미티지의 정리에서 몇가지 명제들을 떼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아미티지에 따르면 비릴리오의 이론은 근대도시의 성장과 인간 사회의 진화를 상당히 설득력있게 설명해주는 전쟁모델을 채택하고 있다. 예를들어 요새화된 도시는 부동의 전쟁 기계이고 거주의 관성이 지배했던 정치적 공간이자 정치의 특정한 배치이며, 봉건제 시대의 물질적 토대이다. 그러므로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경제적 변화였다기 보다는 군사적.공간적.정치적.기술적 변형이었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적 역사개념을 쓴 곳에서 비릴리오는 군사적 역사개념을 쓰고 있는 셈이다.

아미티지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군사전략, 공간 계획 등이 비릴리오의 정치이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주요 참조점이며, 근본적으로 그는 기술에 대한 인식을 통해 모더니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비릴리오는 현대의 군국주의와 영토의 공간적 조직화 밑에 깔린 정치적 논리를 이론화하면서 21세기의 질주학적 조건과 정치적 조건을 조망하고, 군사적 역사개념과 과학기술을 활용한 인간 신체의 내부 식민화라는 개념을 통해 모더니티를 재해석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미티지에 따르면 인간 신체의 내부 식민화는 '이식혁명'으로 집약할 수 있겠는데, 이는 인간의 신체와 기술을 구분해주었던 경계가 거의 완전히 붕괴된 상황으로서 인류는 사물 자체 혹은 인간의 삶을 포함해 모든 것을 탈산업적 과학기술 생산과정의 원료로 만들어 버리는 세계에 종속된 기계적 존재가 되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태를 현대 인류의 신기원의 출발점으로 여겨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례를 어디선가 본 듯도 하나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나는 비릴리오의 주장의 구체적 사례를 찰머스 존슨의 인터뷰에서 발견한다.

본래는 1977년에 나온 <<속도와 정치>>에 비해 한참이나 나중에 출간된 <<정보과학의 폭탄>>(1998)은 '질량전쟁', '에너지 전쟁'에 이은 '정보전쟁'에 관한 단상 묶음이다. 이 책은 <<속도와 정치>>에 비해 독서가 수월했으나 다음 몇 가지 주장 외에는 거의 동어반복들이었다.

역사의 종말 대신에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지리의 종말이다.
시각적 연속성이 국가 간의 영토적 접근성을 대신한다.
수송과 전달의 시간적 압축에서 생겨나는 극단적인 거리의 축소는 원격감시의 일반화를 불러온다.
인간 종의 인위적 선택은 새로운 우생학을 낳아 놓았다.
생명공학의 절차에 의해 생물을 산업화하려는 것은 프로메테우스적인 제조를 끝내는 것이다.

 

출처 : http://armarius.net/ex_libris/archives/0007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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