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에 재미있는 대사가 나온다.

"범퍼가 삐뚫어졌군"
"범퍼는 정상이고, 땅이 경사진 것입니다."
"내 눈은 정확해"
"당신 눈이 잘못 되었군요"

대충 이런 대사...

무엇이 삐뚫어졌고, 어떻게 이해를 해야하는가?
관찰하는 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듯 이 영화는 시작한다..
 


뉴스에 가끔 등장하는 팔레스타인 분쟁은
가장 악랄하게 힘의 논리가 자행되는 곳이지만,
복수와 희생이란 이름으로 죽어간 이들이 테러범이라 불려지는 뉴스거리들은
건조하고 무감각하다.

이 영화는 팔레스타인 감독이 그 분쟁의 현장 속에서
자살 공격 하기 전, 20대 젊은 팔레스타인의 심적 갈등을 묘사한 작품이다. 

왜 그들은 몸에 폭탄을 둘러야만 하는가.
그들의 감정의 흔들림을 쫓아가다보면 동조와 반감, 그리고 연민에 이른다.



"난 지옥에 사느니 머릿 속의 낙원을 믿겠어"


두 명의 20대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천국'으로 향한다.
개인적인 문제, 사회적인 요인, 주위에서의 보이지 않는 강요.
배신자에 대한 무자비한 복수,
적에 대한 맹렬한 투쟁... 

모든 것은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면 죽은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죽어라.

이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떨어진 명령이다.

선택은 두가지이다.
순교자가 될 것인가, 배신자가 될 것인가.

비디오 가게에서 순교자를 찍은 테이프는 단 돈 4세르에 빌릴 수 있고,
(순교를 거부하거나 완수하지 못한) 배신자의 테이프는 더 많은 돈을 주어야만 한다.

비디오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희생은
비디오 테이프처럼 누군가에게 전시되고, 대여된다. 
그것은 세습되는 초현실적인 믿음처럼 퍼지지만,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구렁이다.

나 역시 이러한 상황에 닥친다면,
머릿속에 존재하는 낙원을 믿고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알라신 가라사대:
"저들이 너와, 너의 백성들을 핍박한다면
알라는 고통받는 성도의 형편을 익히 아시고, 그 중 한무리를 선택하사.
알라는 불의를 증오하시니 알라는 진실로 말하노라.
너희는 불의와 범죄를 처단하라 이 모든 것들에 굴복하지 말지어다,"

해서, 나는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도록 결정한 바.
그 목적은 오로지 투쟁하는것이다.
무력으로 우리에게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고
하류계급 아니면 죽음을 강요하고 있는 바,
억압받는 백성들이여, 나는 죽음이 두렵질 않으니
오직 이 길만이 적의 협박과 적의 군대를 이땅에서 몰아내는 유일한 길이다.

난 순교하길 바란다.

부모님들께,
이길을 가고자 선택한 저를 용서하세요.
우린 곧 다시 만날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천국을 향하여...
어쩌면 영원히 얻지 못할 그 날을 위하여,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몸을 갈고 닦는 자들의 희생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쓰여지고, 버려지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슬픔으로 다가온다.




"어떤게 당신을 울리게 하죠? 어떤게 지루하죠?"

"지겨운거요?     인생살이."

 

"인생은 공평하지 않아요, 공평한건 죽음뿐이죠."

"당신말은 서로 죽이고 죽는게 공평하단 건가요?
인생에서 공평함의 다른길을 찾을 수도 있잖아요."



감독의 메세지는 다소 투박하지만,
세계인이 들어야만 하는
팔레스타인 출신 감독의 진지한 고백이다.

점수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