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리베라시옹·르누벨옵세르바퇴르의 세계
[해외의 지성지1] 대중에게 지식인의 입장 표명하는 프랑스의 지성지들
 
양창렬
 

일간지나 주간지에 한정할 경우, 프랑스의 지성지로 불리는 것들은 ‘르 몽드’, ‘리베라시옹’,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등이다. 우리는 이 매체들 속에 어떻게 지식인들이 참여하고, 어떤 쟁점들이 이슈화되며, 그것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프랑스의 지성지가 이런 저런 논쟁에 지식인들의 참여를 유도하거나, 또는 지식인이 직접 참여를 하는 방식은 대략 네 가지로 그 유형을 말할 수 있다. 
 
첫째, 어떤 정세 하에서 특정 사안에 대해 지식인들이 시국 선언을 하는 경우. 가령, 불법 체류자 강제 추방에 반대해 알랭 바디우, 실뱅 라자뤼스, 나타샤 미셸 등이 ‘르 몽드’에 기고했던, ‘모두를 위한 프랑스’, ‘무엇을 사고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던가, 지난해 11월 방리유 소요 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처를 신랄하게 비판하기 위해 에티엔 발리바르, 베르트랑 오질비, 엠마누엘 테레 등이 ‘뤼마니떼’ 지에 기고한 ‘공화국, 조심하라!’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글들은 토론을 촉발시키기보다는 대중이나 여타 지식인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프랑스의 대표적 권위지 <르 몽드>     © 양창렬

 
둘째, 최근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방식인 대화방 및 토론 게시판 개설. ‘르 몽드’의 채팅(chats)이나 ‘리베라시옹’의 리바운드(rebonds),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논쟁(D?bats) 코너가 그 예다.
 
가장 활성화된 ‘르 몽드’ 채팅의 경우, 신간을 낸 저자나 신문사 내외 전문 기자, 혹은 교수, 연구원들이 초대되어 예고된 시간에 대화창을 통해 1시간 동안 독자들과 질문 및 답변을 주고받는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신문사측의 매개자가 질문들을 선별해 토론자에게 전달하고, 이후 문장을 다듬어 기사화하는 방식이다. 최근 다뤄진 주제로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란 핵문제, 석유가격 상승과 같은 국제문제, 마호멧 캐리커처나 무슬림 여성들의 두건착용과 같은 종교문제, 최초 고용계약(CPE) 법에 대한 찬반토론과 같은 경제 사회 문제, 조류 독감이나 유전자 변형 식품과 같은 환경, 건강 문제 등 전 분야를 망라한다.
 
‘르 몽드’의 ‘관점(point de vue)’ 역시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이 직접 참여하는 코너이며, 여기에 실리는 색깔 있는 글들 밑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댓글들이 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방이나 논설들은 전문가들 간의 쟁점 토론이 아닌 지식인과 대중의 소통의 장의 성격을 띤다.
 
셋째, 일간지가 자체적으로 오프라인 토론회를 개최하고 토론내용을 녹취하는 경우가 있다. ‘리베라시옹’에서는 지난해 5월, 유럽통합헌법안 찬반토론회를 개최한 뒤, 각 발표자들의 발표 내용을 정리해 여러 회에 걸쳐 게재한 바 있다. 이 경우 '문제'는 당시의 정세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지성지는 사회적 쟁점 자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주어진 문제가 쟁점화될 수 있도록 조직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어떤 기사에 대해 그와 관련된 이가 답변을 보내는 경우. 특히 논쟁적인 서평이나 주장들에 대해 그 서평 혹은 비판의 대상이 됐던 이가 서신답변을 보내는 경우. 예를 들어, 이브-샤를르 자르카는 ‘르 몽드’에 게재한 ‘칼 슈미트, 나치 철학자?’라는 글에서, 발리바르가 칼 슈미트의 나치 가담 전력을 무디게 만들면서, 그의 이론을 좌파정치에 적용하려 한다고 비난하는데, 이에 대해 발리바르가 서신으로 답변을 보낸 일, 혹은 2005년 11월 장-뤽 낭시가 ‘프로이트, 하이데거, 우리의 역사’라는 글에서 프로이트와 하이데거에 대해 언급도 못하도록 만드는 분위기를 넘어서 그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토론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피에르 바야르가 어떻게 나치의 희생자였던 프로이트와 나치의 배후 철학자였던 하이데거를 함께 놓을 수 있는가라며 비판한 일 등이 그러하다. 이 경우에도 지성지는 우편배달부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쟁점의 수신자와 발신자 기능을 하지는 않는다.  

▲프랑스의 대표적 좌파지 <리베라시옹>     © 양창렬

한국의 ‘교수신문’이 하나의 지성지―지식인이 직접 쓰고, 지식인을 대상으로 하는 매체라는 의미에서―이자, 담론 생산자 역할을 독특한 방식으로 행하고 있는 반면, 여전히 일반신문과 그리 차이나지 않는 프랑스의 일간지에서, 더구나 지식인들 간의 교류가 아닌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소통에 집중하는 매체에서 학술 담론의 생산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언급한 일간지 혹은 주간지의 형태를 띠는 프랑스의 지성지들은 지식인과 대중의 교량 역할을 하는 데 그 본 기능이 있는 것이지, 한국의 ‘교수신문’처럼 지식인들 사이의 직접적인 학술, 쟁점토론, 비평을 위한 교환의 장을 마련하는 것에 주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역할은 프랑스 학계의 깊이와 대중성을 모두 보여주는 전문화된 월간지들―‘마가진 리테레르’, ‘크리틱’, ‘인간학’, ‘역사’, ‘카이에 뒤 시네마’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처럼 일간지들 나름대로 전문기자들을 통해 자체적인 전문성을 유지하고, 학계 역시 다양하고 폭넓은 인적 구성을 바탕으로 적절한 대중성을 갖춘 월간지를 정기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서로 분업화를 이루었다고 한다면, 한국의 ‘교수신문’은, 위에서 언급한 여러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국내 일간지들이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전문성을 대리 보충하기는 하지만, 전문 학술지에 들어갈 만한 내용을 대중적인 용어로 전환하여 쉽게 설명하고 이를 정기적으로 생산해낼 만한 축적된 역량을 충분히 가지지 못하다는 어중간한 상황 속에서 기능하고 있는 다소 독특한 매체라고 생각된다.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표지     ©양창렬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장 다니엘이 고백하듯이, 어차피 기층 노동자들은 지성지를 읽지 않는다. 따라서 지성지에서 생산, 조직되는 학적, 사회적 논쟁들이 얼마만큼의 '대중적' 파급력을 가지는지를 명확히 규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지성지의 '힘'을 전문성이나 권력에 대한 올곧고 냉철한 비평 정신에서 찾든, 아니면 프랑스의 일간지들이 보여주듯, 지식인과 대중의 경계를 허물고, 대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는 싸르트르가 제창한 ‘리베라시옹’의 강령, "인민에게 말을 주자"에서도 발견된다―에서 찾든, 비판적 지성지가 갖는 역할 및 필요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 필자는 <교수신문> 프랑스 통신원, 파리1대학 박사과정 재학중입니다.
* 본문은 대자보와 기사제휴 협약을 맺은 <교수신문>(www.kyosu.net)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2006/04/26 [07:23]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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