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돌바람 > 전쟁과 죄책-진실로 상처 입는다는 것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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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 -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
노다 마사아키 지음, 서혜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원제는 『전쟁과 죄책戰爭と 罪責―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이다. 저자는 “무엇을 슬퍼하지 않았던가. 과거에 대한 부인은 그 사회에 상흔을 남긴다”(메체를리히, 마가레트 『상실된 비애』)는 현 독일 사회 정신분석학자의 전쟁에 대한 반성을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는 죄에 대해 공동으로 방위한 사실은 성격 속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는 전쟁기 ‘개인의 체험과 기억’을 통해 받아들인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한 일본 사회에 적용한다. 저자인 노다 마사아키 선생은 “침략전쟁을 재검토하지 않는 것, 그 시기에 어떤 전쟁범죄를 거듭 저질렀는가를 검증하지 않는 것은 문화를 가난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것은 ‘침묵의 유산으로서의 문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침략전쟁임을 인정하고 피해보상을 했고,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독일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부모 세대의 ‘나치의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이 과거에 대해 반성하기 시작한 것은 용기있는 소수가 자신의 정신사를 밝히고 그것을 자의에 의해(개인의 죄책감으로써) 고백하기 시작한 1980년대의 일이다. 선생은 전쟁의 상처란 그들과 마찬가지로(전쟁책임에 대해 국가적인 사죄와 보상이 없었으므로 그들보다 더하다고 볼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일본 사회에 ‘침묵의 유산’을 남겨놓았으며, 이것이 현대 일본인의 정신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를 열 명(전쟁을 수행한 사람들의 자녀를 포함)의 사례를 통해 밝히고 있다.
1. 국가의 전쟁과 개인의 전쟁―국가의 죄의식(사죄)과 개인의 죄의식(고백)
유아사 켄은 중국 산시성 타이위엔(731부대)에서 총 일곱 번의 생체실험에 참여하였다. 첫 생체실험 대상자는 중국 팔로군이라는 혐의로 잡혀 들어온 농부였으며 그는 살아 있는 채로 세 시간 동안 해부되었고 해부가 끝난 후에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당시 유아사 켄에게 생체실험 대상자는 그저 적이었을 뿐이며, 첫 생체실험은 그날 밤 술을 한잔 하고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이 죄라고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저 전쟁이었고 시키기 때문에 한 것에 불과했다. 때문에 그는 이후 계속 생체실험에 참여했음에도 패전 후 일본으로 바로 귀한하지 않을 정도로 죄라는 의식이 없었다. 1951년 중공군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지 4년이 지난 후에야 그는 자신의 생체실험을 자백한다. 그것은 자신이 실험했던 자의 어머니의 편지를 읽은 이후에 생긴 죄의식 때문이었다.
“유아사여. 나는 네가 죽인 남자의 어머니다. 죽기 전날, 아들은 루안의 헌병대에 끌려갔다. 나는 헌병대까지 가서 문 앞에서 쭉 지키고 서 있었다. 다음날,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아들이 묶인 채 트럭에 태워져 어디론가 끌려갔다. (…) 다음날, 아는 사람 하나가 와서 가르쳐줬다. “할머니, 당신 아들은 육군병원에 끌려가서 생체해부됐어요”라고 그 사람은 말했다.”
그는 저 어머니의 편지에 의해 비로소 자신이 생체실험한 남자가 갑자기 하나의 인격체로 느껴지기 시작했으며, 그가 팔로군이 아니며 그저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생체해부 재료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자백함으로써 패전 후 11년이 지나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그 11년 사이, 자신의 과거를 응시하고 죄를 고백하기까지와 당시 일본 사회 사이의 커다란 괴리를 느낀다. 그리고 6년 뒤 군의관으로 있었던 전쟁 당시의 경험을 ‘생체해부 리포트’ 형식으로 고백한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협박편지와 중국과 일본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경고, 그리고 ‘전쟁이란 비참한 것’이라는 손쉬운 변명이었다.
‘전쟁이란 비참한 것’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단서가 달린다. 전쟁은 국가에 의해, 국가의 명령에 의해 수행된 것이며, 때문에 전쟁기 개인이 저지른 모든 행위는 ‘전쟁의 비참’이라는 성급한 일반화에 의해 감춰지고 용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개인이 죄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이러한 사회에 편입되어 있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못할 때, 그들은 전쟁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할 수 없다. 잊었던 일들이 되살아나도 그것은 자신의 문제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유아사 켄은 이것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죄의 고백을 통해 되풀이하며 교육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왜 죄가 되는지 알지 못했으며, 수용소에서의 계속되는 고백서를 통해, 그것이 국가의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자신’이 저지른 일임을 받아들이는 데만 4년이 걸린 셈이다.
오가와 다케미츠는 처음에는 초년병으로 지원했다가 나중에는 베이징 제1육군병원의 군의관으로 근무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의료전도를 위해 배운 임상의학이 살아 있는 인간의 배를 가르는 데 쓰이는 것에 반대하여 군의관이 아닌 초년병으로 지원한 경우다. 그는 “현실 사회의 불의를 비판하지 않는 자는 맛을 잃은 소금이다. 비판은 정의의 소리다”라는 야나이하라 타다오의 해방신학의 입장을 받아들여 “현실 국가의 명령에는 복종해야 하지만 현실 국가가 말하는 바를 변호한다면 기독교의 존재 가치는 없는 것”이라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군의 과정을 거부했지만 그는 군의관으로 배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집단으로는 강한 인간이 개인이 되면 얼마나 약한가’를 깨달았다. 그리고 개인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억지로 억누를 때 그것은 폭력(자기 방어로 총을 쏘는 정당방위)으로 전화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전쟁신경증’ 환자들을 여럿 만나게 된다. 영양실조증이 전쟁기 대표적인 거식증으로 나타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실어증, 자상, 야경증과 히스테리성 경련, 보행장애를 겪는 사람들로부터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들을 치료하는 것은 그들을 죽이는 것이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이 이러한 신경증을 겪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억눌린 마음/정신/양심이 국가의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해져야 할 때 생기는 억압의 기제로 ‘신체가 사는 것을 거부한’ 당연한 현상인 것이다. 그는 전후 ‘야스쿠니 법안 반대’에 앞장섰으며, 이는 “전쟁에서 죽어간 자는 ‘영령’으로 여겨지는 것을 거부했는데 살아남은 자가 전사자를 영령으로 부르는 악법”임을 고발한다.
*전범 사형수의 유언
타카가이 마사루(헌병준위), 다카하시 테츠오(분소장), 구로사와 요시타카(헌병 조장)
“총살형을 앞두고 멀리 조국의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 사죄는 수치가 아니라 일본의 양심입니다. (…) 조국 일본의 평화와 양심은 민족의 반성 없이는 얻을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일본군의 죄를 짊어지고 총살당합니다.” ―60~61쪽
그러나 이런 활동을 줄기차게 해오고 있는 오가와 다케미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한다. “결코 그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잘 모르는 것이 많다. 나중에 그것이 그랬었구나, 하고 알게 되는 일이 적지 않다.” 과거의 짐을 지겠다고 선언한 그였지만 그 역시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묻혀진/지워진 기억을 캐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2. 죄와 벌의 거래―탄바이坦白와 인죄認罪
일반장교로 전후 17년이 지나서야 본국에 송환된 고지마 다카오는 산둥성 토끼사냥의 책임자다. 1942년부터 중국인 강제 연행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는데 그들은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을 나무에 메달아 찌르기 연습용으로 쓰거나 노예로 삼았으며 급기야 이를 참지 못한 하나오카 광부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100여 명을 학살했다. 패전 뒤 소련군 포로로 억류되어 있으며 그는 처음에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나는 전범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데 누군가 자신이 관계했다는 것을 말한다면 어떡하지”라는 갈등을 하게 되고 우순감옥에서의 전범 처리 과정(1. 일본군이 저지른 과정을 알려준다. 2. 충분한 보살핌과 인간관계를 회복시킨다. 3. 자신의 죄를 고백-탄바이坦白-할 때까지 끝까지 기다린다)에 의해 조금씩 변화되어 간다. 그는 탄바이 과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죄행을 모두 기억해내려고 애쓰지만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무엇을 고백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지워진/망각된 기억을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다. 앞서 유아사 켄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데 4년이 걸렸듯이 그 또한 어떻게 해야 자신이 풀려날지, 어느 것을 빼고 어느 것을 밝힐지, 어느 것을 말해야 다른 사람들의 말과 혼동이 없을지 등을 계산한다. 이것은 타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겠다고 하는 편협한 계산이며, 죄와 벌을 거래하는 것이다. 당시 그는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만 이것은 피해자의 원한과는 상관없으며, 당시의 그로서는 상처 입은 자의 원한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사실 우순감옥의 간수들은 그들이 소녀, 소년이었을 때 가족의 살해, 고문, 실종, 강간, 집단학살을 직접 겪은 피해자들이며 일본인들의 죄상이 적혀 있는 민간인들의 고발장을 갖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도 그들이 자신의 죄를 계산하는 자가 ‘진정으로 고백할 수 있을 때’(단순한 ‘고백’이 아닌 탄바이의 진짜 의미다)까지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전범을 처리할 때 한 명도 사형시켜서는 안된다”고 하는 전범처리에 대한 중국 정부의 명령과 교육 때문이다(‘일제에 협력한 중국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당시 분위기로 볼 때 사실 나는 이 부분이 의심쩍다. 그러나 당시의 이런 전범처리 과정은 현대의 사형제도와 관련해서도 과히 선도적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저우언라이 자서전을 뒤적여볼 테다. 또 하나, 2002년의 기록인 김현아의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가 개인으로서는 용서가 안 되지만 베트남당의 방침이기 때문에 한국을 용서하고 화해한다고 말한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죄와 벌의 거래는 선악의 기준이 타인에게 맞춰져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러나 죄를 인정한다는 인죄認罪의 의미에서의 벌은 죄를 되짚어 체험하는 것으로 가해와 피해의 사실fact에 의한 인식을 요구한다. 죄책감은 여기서 생겨난 직접적인 체험의 상기로부터 타자의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면 직접적인 체험의 상기는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물을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행위를 재해석하기 이전, 즉 사실fact을 끄집어내는 것으로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우순감옥의 전범처리 과정은 이러한 사실을 숨김없이, 거짓없이 끄집어낼 수 있도록 가해자에게 시간을 주고 그들을 보살피는 전범처리에 대한 전무후무한 전례로 보여진다. 그러나 자신의 잔혹한 행위의 사실을 인정하고 기억해내고 타자의 고통으로부터 죄의식을 느꼈다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고백)은 개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괴로운 일일 것이다. 체험을 억압하는 망각의 시간에서 벗어난 개인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다시 잊고 싶은 기억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까지 평생을 다 쏟아부어도 다 고백할 수 없는 거라고, 죄가 씻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학살의 책임자가 광기의 전쟁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전쟁 책임이 있는 국가에 대한 모독이 된다.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 죄를 개인이 짊어질 수 있을까. 한 가지만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죽인자도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슬퍼할 수 없지만, 국가의 명령에 의해 수행된 전쟁에서 직접적인 학살자로 기억되는 개인은 충분히 슬퍼해야 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쟁과 인간의 비참이라고 말하면 국가는 또 면죄부를 받게 되는 걸까. 아니다. 슬픈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것이며,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슬픔을 통해 전쟁에서 저지른 죄를 의식하고, 사는 의미를 돌아볼 수 있을 때 개인은, 국가는 경직된 역사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것을 국가가 제약하고 억압할 때,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강력한 문화적 이데올로기를 유포시킨다 하더라도 이것은 늘 소수에 의해 침식당해왔다.
3. 전쟁에 대한 일반화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인간을 짐승으로 만든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인간을 짐승으로 만든다”는 말은 누구나 사용하지만 이것은 전쟁에 대한 일반화로 범죄를 중화시킨다. 개개의 사례를 검토하고 귀납한 것이 아니라 미리 일반화한 것이며, 이것의 배후에는 ‘사실fact’을 잊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인간이기보다는 야전 소대장이기를 선택한 도미나가 쇼조는 인간사냥꾼임을 자청했지만 그 또한 탄바이 과정을 통해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총을 메고 중국으로 오는 일은 없도록 해달라”는 간수의 인사를 받으며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자신이 죽인 자들이 인간이었음을 수용소의 ‘낙서’를 통해 재발견하게 된다. 유아사 켄이 생체실험 대상자 어머니의 편지를 보며 피해자가 한 가정, 한 국가의 일원임을, 나아가 인간임을 느꼈듯이 그 또한 전쟁 당시 학살 대상자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전쟁에 의해 키워진 짐승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성장과정을 보면 직접 전쟁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소년기에 접한 군국주의 사관과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가 하나의 집을 이룬다(팔굉일우)는 사상 등은 당시 일본의 대다수 젊은이들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주입된 이데올로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전쟁에 뛰어들어 총부리를 겨누기 전부터 전쟁사관을 교육받고 자라난 세대인 것이다. 그의 눈에 적이 인간으로 보였을 리는 만무하다. 처형이나 숙청에 쓰이는 눈가리개는 그가 상대의 눈을 통해 인간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심리적인 방어수단으로 쓰였으나 그는 수용소의 ‘낙서’를 통해 그들도 인간이었음을 처음으로 고백하게 된다. 그는 명령자와 실행자의 책임은 별개라는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조금씩 총포 노리개로 사람을 쏜 일이 스스로의 의지로 행한 것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이는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인 자신도 인간임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그는 이후 부대에서 유일하게 총을 쏘지 않았던 승려를 기억해낸다.
오늘날 사회는 ‘권위’를 분산시키면서 개개의 권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손쉽게 복종하도록’ 심리를 조장한다. 다시 말해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국가) 권위의 선한 의사를 맹신하는 쪽으로 기운다. 국가와 개인이 타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병역 대체복무)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심정적으로는 동의하지만, 법질서와 국가안보를 주장하는 사회 대다수 일반의 의사는 국가의 선한 의지, 다시 말해 국민을 지켜준다는 국가방위 의무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신념/양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폭력을 강요하는 명령 앞에서 인간이 윤리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종교’라는 가치체계에 의해서만 가능한가. 전시기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종교적 신념에 의해 총포 사격용 노리개가 된 인간에게 총을 쏘지 않은 승려가 있었다. 그는 군법에 회부되지 않고 가벼운 질책을 받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 대신 ‘종교’라는 절대적 권위에 의지해서 비인도적 행위를 거부했다. 이러한 경우에도 그는 인간임을 거부했기 때문에(자신의 의지가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처벌받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임’을 고백하고 되살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 이것을 못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정당하지 않다. 물론 여기서 인간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뜻한다. ‘이것을 못하게 하는 것’을 파헤치기 위해 저자는 ‘공격성에 대한 적극적인 분석’을 제안한다. 이런 것이다. 평화는 이성에 의해 유지된다. 그러나 전쟁에 치를 떠는 평화운동만으로 평화가 가능하겠느냐. 내면에 공격성을 숨긴 긴장의 강도가 강한 사회에 대한 분석을 하면 그 사회의 (숨겨진) 공격성(침묵을 포함한)이 어떻게 처리되고 이용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공격성의 부인
예1) 1938년 난징대학살에서 누가 중국인을 많이 죽이나 내기를 해서 당시 일본 신문에도 실렸던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의 유언. 그들은 유언 끝에 “천황폐하 만세! 중화민국 만세! 일본국 만세! 동양평화 만세! 세계평화 만세! 죽어서 호국의 혼이 되겠다!”고 끝맺는다. 자신들이 희생자가 되어 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호국 혼이 되어서. 그들이 만행은 뒤전이고 그들의 죽음은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지고 있지 않은가 물을 수 있다.
“나는 천지신명께 맹세코 포로와 주민을 살해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난징 학살사건의 죄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내가 죽음으로써, 중국 항전 8년이 패배로 끝난 데 대한 한을 씻고, 일중 친선, 동양 평화의 단서를 이룬다면 이렇게 버려짐을 행운으로 알겠습니다. (…) 공평한 사람이 기사를 보면 분명히 전투행위라고 할 것입니다.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무카이 도시아키
“포로, 비전투원의 학살, 난징 학살사건의 죄명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거부하겠습니다. (…) 우리의 죽음이 중국과 일본에 계기를 마련하여 양국이 제휴하게 되고, 동양 평화의 다리가 되어,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가 도래할 것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노다 쓰요시
예2) 전쟁 지도자인 도조 히데키의 유서. 그의 장문의 유서에는 이후 학교 교육의 방향, 야스쿠니신사 합사, 용병제까지 언급하는데, 선생의 말을 빌리면 “이후 일본은 반세기에 걸쳐 도조의 의사를 그대로 따라온 것처럼 보인다”고 하고 있다.
“나 자신으로서는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불만 없이 형장으로 간다. 단, 이 일로 동료들에게 책임이 미치게 된 점, 또 하급자에게까지도 형이 내려진 점은 실로 유감이다. 천황 폐하에 대해, 또 국민에 대해서도 죄송스럽고, 깊이 사죄한다. 원래 인본의 군대는 폐하의 인자하신 뜻에 따라 행동해야만 했으나, 일보 과오를 범하여 세계의 오해를 받은 것은 유감이었다. (…)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은 이번 일은 잊고 장래 서로 협력해야 할 것이다….” ―도조 히데키
4. 광기의 전쟁 ― 마음껏 살인하다
도미나가 쇼조와 마찬가지로 군국주의 사상을 숭앙하며 자라온 이가 ‘살리는 것도 내 마음이요, 죽이는 것도 내 마음이다’라는 식으로 전쟁에 임했을 때, 또는 전쟁 속에서 그렇게 길러졌을 때 그 전쟁은 광기와 학살로 얼룩진다.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여인의 음경을 불로 지지고, 임신한 여성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며, 한 가족의 몰살을 어린 아이로 하여금 목격하게 하고, 집에 불을 놓아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일본도로 찔러 죽이며, 아비가 아이를, 아이가 아비를 죽이게 하는 광기의 전쟁놀이는 정서결여자, 감성마비자들이 저지를 수 있는 일들이다(저지 코진스키의 자전소설이라고 하는 『무지갯빛 까마귀』에서는 이러한 광기의 전쟁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단 그것이 자전소설인지는 의심해볼 부분이다). 이들은 짐승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전쟁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것은 사진 자료가 풍부한 난징대학살만의 일이겠는가. 아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이전과 전쟁기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저질러진 민간인 대학살에서도 이러한 광기의 전쟁은 한 마을의 몰살로 이어졌다.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은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4장 학살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전범들이 당시 일본의 사회적 성격이라는 것과 그들이 잊으려 하지 않아도 잊고 살 수 있도록(묻어두도록) 국가가 나서서 도와주고 있다는 점이다. ‘무감각’이라는 것은 외부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는 감각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다. 전쟁에서 이러한 무감각한 인간의 감성은 채널에 따라 움직인다고 선생은 말한다. 영화 <블랙박스>를 상기하면 쉽게 동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식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아버지였지만, 그는 나치 정권하에서 유대인을 집단 처형하고 가스실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것처럼, 전쟁에서 감정의 채널은 이데올로기적 질서/인간관계의 상하 복종에 따라 움직이며 이데올로기적 질서는 제국주의 전쟁하에서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가족 이데올로기 등의 채널에 따라 움직인다.
이시이 부대라고도 불리는 731 부대에서 실험용(이들은 ‘특별이송취급용’이라고 하여 ‘특이급’이라고 불린다)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수는 3천 명이 넘으며(유아사 켄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들 중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은 유아사 켄 단 한 명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들의 전쟁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왜 입을 막고 있으며, 왜 국가는 그들이 말할 수 없도록 침묵의 문화를 은연중에 유포시키는지 알 수 있다), 지금도 국가차원의 은폐와 입막음이 행해지는 난징대학살의 참극은 공식적으로는(일본이 사죄를 하지 않았음으로) 그들이 저지른 학살이 아니게 된다. 일본뿐 아니라 20세기 거의 모든 전쟁(세계전쟁, 민족전쟁과 종교전쟁의 형태를 띠는 내전, 국지전)에서 전쟁 수행 ‘국가’는 전쟁을 반대하는 생환자들의 소리를 들을 힘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전쟁신경증을 철저한 폭력으로 억압하여 마음의 상처조차 의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문화”를 형성해나간다. 때문에 전쟁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증언과 고백은 국가가 벌인 전쟁에서 자기 책임을 숨기려고 하는 문화와 죄의식을 잊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몸으로 부딪치는 인간적인 몸부림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각성을 불러오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각성이 전쟁의 본모습인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고백하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 때문에 국가 차원의 보상은(이것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피해자들에게 맞춰져 있으며, ‘과거청산’을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국가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양성된 권력층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이 도전받을 때를 위해 그들은 인간성이 상실된 비판정신(사실 은폐―사실 조작―그것에 의한 교육), 사물을 상대화해서 바라보는 힘을 싫어하는 교육을 심어놓는다.
5. 침묵의 유산으로서의 문화 ― 침묵을 강요하는 문화
전후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군인연금을 거부하며 살아온 오노시타 다이조는 한 개인이 국가와 어떻게 맞설 수 있으며, 그를 둘러싼 협박과 침묵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의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는 단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것을 죄로 느꼈으며, 그 죄를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군인연금을 거부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거부한 군인연금은 그것을 타먹는 대다수 전쟁 참여 군인들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며, 나아가 죽은 자들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공격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공격은 가명/무기명으로 행해진다. (이것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전쟁에서 국군 또한 어린아이와 여성, 노인과 같은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국가로부터 처벌을 받기보다는 국가 건설에 앞장선 자들로 훈장을 받거나 집단 속에 묻힘으로써 군인연금을 타가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대다수의 사람들이 집단 속의 한 명으로 숨어버림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표출한다. 이것은 국가가 침략전쟁임을 부인하고 있으므로 가능해지는 일들이다. 이때 자식들은 부모 세대의 전쟁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 쉽지 않게 된다. 이러한 침묵이 일본 전후 세대의 불안과 비뚤어진 비판정신으로 이어졌다고 선생은 말한다. 아버지의 임종 직전 받은 쪽지에 쓰여진 유언을 보고 구라하시는 아버지 세대의 전쟁을 거꾸로 추적한다. 아버지는 이 글귀를 자신의 비석에 새겨달라고 부탁한다.
“중국 인민에 대해 했던 행위는 죄송스럽고 오로지 사죄하는 바입니다.”
와타나베 요시지는 전쟁에 참여했던 아버지의 경험을 알 수는 없었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가 전염시킨 초조함에 의해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를 미워하였고, 자신 또한 그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과거를 되짚으며 눈을 감고 살아온 전후 시대에 살아 돌아온 일본인인 아버지는 평생 마음의 죄를 고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갈등이 초조함으로 나타난 것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고백을 하는 것도 어렵지만 고백하지 않는 것 또한 이렇게 힘겨운 삶을 마감하게 한다. 고백하지 못한 사람들은 죽음으로써 자신의 무덤에 사죄의 글귀를 새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길러진 강한 인간은 상대적으로 보면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차압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감정의 풍요로움이 없는 한 상처 입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은 능력은 생기지 않는다”고 선생은 말한다. ‘듣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사회’는 그러한 문화를 은연중에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묻고 공감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상처 입은 사람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의해 자신의 무력한 체험을 정리하고 존엄을 되찾을 수 있게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책을 보며 더 이상 뱉어내기 싫어하는 개인의 묻혀진 기억까지 끌어내고 있는 선생의 작업이 지독하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듣는 것의 의미’를 열어놓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이후 그들은 자신의 고백을 통해 비로소 ‘죄를 인식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선생은 다시 한번 강조한다. “어떻게 하면 상처 입을 줄 아는 정신을 되찾을 수 있을까?” 우선은 사실fact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물어야 한다. 무엇을 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굳어 있는 정신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을 때 상처 입을 줄 아는 부드러운 정신은 살아난다. "타자의 슬픔을 감싸안을 수 없는 문화, 개인의 무력함을 돌보지 않는 문화"는 국가는 물론 개인의 죄의식까지도 물을 수 없다. 일본에서도 소수이지만 이렇게 전쟁책임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권력층이 만들고, 행하고 있는 것만으로 일본을 이해하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한국전쟁에 관한 역사서가 많이 나오고 있어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기타 다른 분야에서의 이러한 접근은 사실 전무하지 않는가 하는 점에서 이 책은 중요하다. 한국전쟁에서 가해자였던 전쟁 수행자들 또한 숨죽이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사 청산은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라고 느낀다. 단, 이러한 다각적인 노력이 그들을 밀어줄 힘으로, 문화로 충분히 더 끌어내고, 밝히고, 나아가 그들의 고백을 들어줄 수 있도록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책에서 소개된 참고 서적 : 일본에서 출판된 것인데 국내 번역서가 있는지 모르겠다.
피글리, 『베트남전쟁 신경증』
단 바르온Dan Baron, 『침묵이라는 이름의 유산Legacy of Silence』
미체를리히Alexander Mitscherlich․마가레트, 『상실된 비애Die Unfaehigkeit zu Trauen』
* 아이리스 장, 『난징대학살』(이끌리오) : 책이 절판이다. 나중에라도 읽고 싶다.
난징대학살 중국 사이트 http://www.cnd.org/njmassacre/njm-tran/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