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는 실종, 과도한 인상비평이 남긴 것들
[논단] 무위라는 문명비평가는 진중권 비판 전에 논리학부터 먼저하라

이기현

그동안 진중권을 인신공격 수준으로 "비판"하던 무위는 지난 4일 대자보에 <조셉 켐벨의 신화론과 진중권의 진중권의 무식함>라는 글에서 드디어 세계적인 대가들까지 끌어들여 진중권을 모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먼저 프랑스의 아르센 뤼팡과 영국의 셜록 홈즈를 불러들여 추리소설의 대가들을 모욕하기 시작한 무위는 이후 소칼의 지적사기를 인용한 이후 진중권을 인신공격하기 위해 조셉 켐벨, 맑스 등을 전혀 엉뚱하게 인용해 ‘소칼의 지적 사기’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말해도 그리 심하지 않을 정도의 글을 썼다. 더욱이 장장 A4로 장장 17쪽에 이르는 장문의 글에서 이규태를 비판한 진중권을 비판한 근거가 단지 자신의 경험이 모두인양 하는 논리학에서 자주 나오는 ‘일반화의 오류’를 정확하게 보여줬다. 또한 이후 박정희를 옹호하는 것 역시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고 이전에 끝난 논쟁에서 한 발자국도 더 발전하고 있지 않으며 이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이명박을 옹호하기 위해 역시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는 것을 또 다시 반복했다.

이미 무위가 지나치게 피아를 구분해 상대편에 대한 인신공격 수준의 과도한 비판은 이전에 <무위는 ‘진중권 콤플렉스’부터 벗어라>에서 문제점을 지적한 일이 있다. 그러나 무위는 그 때 이후 지금까지도 진중권이라는 “무식하고 뻔뻔한 지식인”을 비판하기 위해 “문명비평가”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자칭하면서도 전혀 그만한 논리력은 벗어버리고 단지 “내가 보니까 이규태는 맞고 진중권은 틀려”, “진중권이 영어공용화론을 맑스를 인용해 비판했는데 그건 틀려”라는 초등학교 수준의 논리에서 벗어날 의향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을 정도다.

무위의 논리를 하나하나씩 살펴보자.

무위는 1900년 전후에 있었던 두개의 최고의 추리소설을 이렇게 평가한다.

“내가 보기엔 영국에서 괴도 루팡이 대중적 인기를 얻는 소설로 태어나기 어려운 만큼이나 프랑스에서 셜록 홈즈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기에는 너무 따분한 캐릭터다. 이런 차이가 한쪽은 탐정을 영웅으로 만드는 서사구조를 만들어 내었고 또 다른 쪽은 영리한 도둑을 영웅시하는 서사구조를 만들어 냈다.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보수적인 유럽인들에게 이런 특이한 기질을 가진 프랑스 사람들이 농담반 시샘반으로 변덕쟁이 또는 거짓말쟁이로 치부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 문장에서 백년 전통의 양대 연구가, 다시 말해 홈지안과 뤼패니안들은 모두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 된다. 무위의 도입부는 이렇게 대가들, 그리고 이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을 모욕하는 것부터 시작을 한다. 여기에서 무위는 프랑스 사람들의 인식을 자신의 경험에 미뤄 이렇게 설명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전부 거짓말쟁이라는 말이었는데 이건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앙숙이라는 영국 사람들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무위의 이 표현은 유럽에 바이어들에게서 들은 것이 전부다. 간단하게 일반화의 오류라는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무위의 글에서 자신의 경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 하도 비일비재해서 지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뤼팡과 홈즈가 프랑스인과 영국인에게 사랑을 받기 시작한 시기는 뤼팡은 1차대전 이전시기이고 홈즈는 19세기 말이다. 이 시기는 바로 프랑스와 영국의 제국주의의 영광이 극에 이른 시기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당시 추리소설의 비조에 해당하는 포우의 소설부터 시작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제대로 정착을 하면서 한쪽은 탐정으로, 다른 한쪽은 도둑으로 정착을 한다.

뤼팡이라는 인물을 조금 더 살펴보면 실제로 뤼팡이 도둑질을 하던 시기는 의외로 “기암성”까지일 뿐이다. 뤼팡의 인생에서 따지면 20세부터 30대 중반까지의 시기이다. 뤼팡의 매력은 모리스 르블랑이 한 말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다. “형사는 사건을 관찰하는 존재라면 도둑은 사건의 당사자다”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뤼팡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은 모험소설의 요소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처음부터 결말까지 구상해 놓은 상태에서 글을 쓰기 시작할 정도로 치밀한 구성에 지금도 종종 차용할 정도로 무궁무진한 모티브는 뤼팡 시리즈를 말하는 핵심이다. 거기에 당시 시대를 풍자하는 내용들은 당대의 누구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다.
 
수정마개가 실제로 수에즈 운하와 관련한 정치인들의 추문을 바탕으로 구성이 돼 있다는 것에서, 그리고 이들을 비꼬고 가면들을 벗겨내는 모습에서 당시 프랑스인에게 카타르시스를 줬다는 것이 빠질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프랑스 사람들이 농담반 시샘반으로 변덕쟁이 또는 거짓말쟁이로 치부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한 문장으로 왜곡돼 버렸다.

이상하게 시작한 글은 드디어 한국의 좌파로 오면서 더욱 이상해진다.

“나는 최근 한국에서 진보를 참칭하는 몇몇 지식인들 중에서 앨런 소칼이 지적한 이런 류의 지적 사기를 벌이고 있는 현상을 목도한다. 그 중에서도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이런 지적 사기가 정도를 넘어 서고 있다고 판단된다.”

무위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좌파나 우파를 막론하고 한국 지성계에 이렇게 서구문화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사대주의 습성은 매우 만연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최대한 양보해서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무위는 이후 자신만의 상상을 갖고 말을 한다.  한국의 사대주의적 지식인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말하면서 “미국의 빌 게이츠나 조지 소르스 등이 상속세 폐지에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 섰다는 사실”을 인용하고 있다고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이 인용의 핵심은 노블리스 오블리쥬가 아닌 자본의 첨병인 빌 게이츠나 조지 소르스까지도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상속세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전혀 노블리스 오블리쥬와 상관이 없다. 게다가 노블리스의 오블리쥬는 역사상 한번도 자발적으로 이뤄진 일이 없다. 노블리스의 오블리쥬는 민중들이 강제해낸 것이다. 제대로 알고 말을 하기 바란다.

그리고 드디어 진중권의 이규태 비판을 끌어온다. 무위는 진중권이 이규태를 비판한 부분을 다시 자신의 경험에 미뤄 아니라고 말한다. “인도 아라비안 문화를 상당히 접해”왔고 “이슬람 사원인 모스코에도 수차례 가 보았고 심지어 중동 사람들과 식사를 할 땐 수저나 포커 대신에 손가락을 쓸 정도”인 무위가 보기에 이규태의 말이 맞다는 말이다. 유일한 반론의 근거가 중동 사람과 식사를 할 때 자신이 손가락을 쓰기 때문에 더 잘알고 그래서 자기 말이 맞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랍 음식을 먹을 때 그 사람과 똑같이 먹는 것은 예의에 속하는 것인데 겨우 그 수준으로 알고 있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용기는 만용이고 만용을 인신공격이라는 폭력의 수단으로 써먹었다.

이규태의 글을 다시 보자.
 
이규태는 “아랍사람들이 사는 고원지방은 맹하 후에 엄동이 끝바꿈하고 또 같은 계절에도 타는 듯한 낮과 얼음 속 같은 밤이 끝바꿈한다”며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아랍인들은 “극에서 극으로 급변할 뿐 중간의 조화나 완충이 없다”고 설명한 이후 이러한 아랍인들이 적대적인 집단에게 “알라신이 정해주신 숙명이라면 쌍둥이 빌딩이 폭파되건 펜타곤이 폭삭하건 국제 경제가 뒤죽박죽이 되건 미사일이 날아오건 아랑곳없다”고 주장했다. 911 테러를 보고 이규태는 아랍 사람들은 원래 그렇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논리는 흑인들은 금과 유리를 놓고 가지라고 할 때 유리를 선택하기 때문에 이성이 없기 때문에 노예로 쓸 쑤 있다고 한 것이나 흑인들은 더운 곳에 살기 때문에 게을러서 혼자 살지 못하기 때문에 우월한 민족의 지배를 해도 된다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또 하나의 야만의 세기인 제국주의 시대에 제국주의자들이 써먹은 논리다. 이러한 것들에 별로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은 자기 스스로가 인종주의자라는 말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렇게 대가들을 왜곡해서 모욕을 한 무위는 이후 맑스를 끌어들여 영어공용화론이 맑스 이론에 따르면 맞다고 주장을 한다. 여기에서 일단 맑스가 무소불위의 비판이 허락되지 않는 진리만을 말한 사람이라는 오류는 일단 뺀다. 다만 “영어가 계급”으로 인식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영어를 더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없는 자들에게 주자는 말은 말장난이라는 것만 하겠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일제 말기 한국어 사용을 금했던 것이 한국 민중들의 삶을 얼마나 억압하는 도구로 활용이 됐는지만 확인해도 충분하다. 진중권이 맑스를 인용한 것은 맞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위가 이상한 것일 뿐이다.

그러더니 조셉 켐벨을 끌어들여 조셉 켐벨을 모욕했다. 무위는 “정반대로 민중들의 자발적인 박정희 향수와 희구에는 절대로 무시하지 못할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글의 서두에 활용해야만 올바른 예시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실소를 금치 못하겠는 부분이 박정희 향수의 메커니즘을 분석한 “과학적 근거”가 졸지에 박정희 향수의 ‘정당성’이라고 무위에 의해 왜곡 되고 있는 부분이다. 미안한 충고지만 책을 읽는다면 자신의 인식체계에 책을 맞추지 말고 그대로 읽기 바란다.

그리고 구술문화는 파시즘을 말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이미 예전에 비판한 일이 있었는데 여전히 똑같은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것은 여기서는 간단하게 지적하고만 넘어가겠다. 적어도 ‘문명비평가’라는 엄청난 타이틀을 내세우고 싶으면 최소한 나태하지는 않기 바란다. 나머지 박정희 옹호논리와 이명박 옹호논리는 이전부터의 논쟁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생략한다.

끝으로 한마디만 덧붙이겠다. 예전에 무위는 “공산주의을 이해할려면 10개의 책을 읽어도 된다면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1000 권의 책을 읽어도 부족”하다고 한적이 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무위 자신이 얼마나 책을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그것조차도 자신의 생각에 짜깁기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면 얼마나 봤는지 모르겠다. 다만 지금까지 최소한 5000권을 읽은 상태에서 아직도 공산주의를 제대로 모르겠는데 어떻게 겨우 열권의 독서량으로 이해가 가능한지 알려주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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