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막절(草幕節(Sukkot)) : 유대인들이 연중 기리는 약 9가지 축제 중 하나로써, 무교절 축제를 지낸 뒤 정확히 반년 만에 추수절을 끝내면서 초막절 축제를 지내도록 되어있으며, 이집트를 벗어난 초기에는 초막절이 가장 큰 축제였다. 유월절(과월절) 및 칠칠절(맥추절, 초실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이다(출애굽기 34:22). 절기를 축하하는 동안 장막(sukkah)집에서 사는 것은 그들의 습관에서 나왔으며, 선조가 40년 동안 장막에서 살며 방랑하던 유목생활을 기억하여 기념하기 위함이다.

 

★뚜레 증후군(틱 증후군) :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근육이 빠른 속도로 리듬감 없이 반복해서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는 장애이다. 잠시 동안은 참을 수 있지만 한계를 넘으면 더 심해진다. 의지만으로는 억제할 수 없다.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지만 잠을 자면 없어지고, 심리적으로 불안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해지기도 한다. 환자의 대부분은 운동틱을 보이는데 눈·얼굴·목·어깨 등을 움찔거리고 심한 경우에는 팔·다리·몸통을 흔들어대기도 한다. 음성틱은 마른기침을 하는 것처럼 '큭큭', '푸푸' 등의 소리를 내는 증세를 말한다. 이러한 증세는 일시적으로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없어졌다가 다시 생기기도 하며 다른 형태로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 뚜렛장애(tourette disorder)는 증상이 가장 심한 경우로 여러 형태의 운동틱과 음성틱을 동시에 보이면서 여러 가지 행동상의 문제를 야기한다.


★드라마 트루기 : 어원은 ‘각본의 상연’이란 뜻의 그리스어(語)인 드라마투르기아(dramaturgia)이다. 일반적으로 희곡이론을 추상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희곡 창작의 실제와 외부화에 부합되는 구체적인 이론, 특히 희곡의 작법을 뜻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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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배이면서,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는 두 사람이 있다. ‘모세’와 ‘폴 바넬’이 바로 그들이다. 한 여자(아내)만을 지극히 사랑하고, 말썽을 부리는 불청객이 가장 극적인 순간에 찾아온다는 것까지, 여러모로 그 둘은 너무나도 닮아있다. 그러나 하늘은 그들이 처한 극적 상황에 발뺌이라도 하듯, 안타까운 마음이었을는지는 모르지만, 그 둘을 서로 만나게 하지는 않았다. 기실 그랬다가는 황당한 질문에 답해야 할 곤란한 처지에 놓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영화 속 인물들이지만, 나는 하늘에 계신 그분께 이 둘 대신 애꿎은 질문을 던지고자 이렇게 두 사람을 억지로 만나게 했다. 무슨 질문이냐면, “신이시여! 이 둘 중에 누가 바르게 사는 것입니까? 과연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우슈피진(2005)> 감독: Gidi Dar 주연: Shuli Rand

모세와 말리는 정통 유대교인으로서 예루살렘에 가난한 살림을 차린 중년의 부부이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그나마 유일신께 귀의한 삶을 살기에 금슬은 좋지만, 아직 슬하에 자식은 없다. 곧, 중요한 명절 중 하나인 ‘초막절’이 다가오지만, 당장 끼니도 없는 터라 막막한 상황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습게도 모세는 기도라는 방법으로 여차여차 신들린 듯 그분을 찾는다. 그리고 불행중 다행으로 로또 같은 기부금을 타게 된다. 그 돈으로 초막절 준비는 물론이고 신성한 물건(citron)도 거금을 들여 구입하게 되는 등 축복의 연속이다. 하지만, 누가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탈옥한 그의 옛 친구와 공범이 초막절 기간에 모세를 찾아든다. 예의와 전통상 그들(우슈피진: 성스러운 손님을 뜻함)을 융숭하게 대접해야만 하는 모세와 말리에게 일어나는 해프닝은 축복은커녕 고난으로만 여겨진다. 여러 가지 해프닝 속에서 모세는 마침내 그 일련의 사건 속에 숨은 ‘신의 뜻’을 깨닫게 된다.


<빅 화이트(2005)> 감독: 마크 마이로드, 주연 : 로빈 윌리엄스, 홀리헌터, 지오바니 리비시

폴 바넬은 사랑스럽지만 뚜레 증후군을 앓는 마가렛을 아내로 두고 있다. 이들 부부 역시 모세 부부와 맞먹을 만큼 애절한 금슬을 나누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바넬의 사업은 부도위기에 처해 이래저래 급박한 상황이다. 이에 소식이 몇 년간 끊긴 동생의 생명보험금을 청구하지만, 까다로운 보험사 요건에 걸려 이내 거절당한다. 그러나 하늘이 도우사 우연히 쓰레기통에서 동사체를 발견하고, 이내 동생의 사체로 가장해 보험사기극을 꾸미려 한다. 그러나 그간 소식이 끊겼던 동생이 느닷없이 불청객처럼 찾아들고, 또 사체를 찾기 위해 수소문인 악당들, 그리고 집요한 보험사 직원이 서로 얽혀 사기극의 성공 여부를 타진해 보기엔 넘어야 할 장애물이 겹겹이다.


무엇보다도 이 두 영화는 인물중심의 드라마트루기가 주이다. 즉, 다른 재미는 몰라도 이들 캐릭터가 세계와의 싸움에서 어떤 방식을 택하는지는 이들 영화의 가장 놓쳐서는 안 될 관람 포인트이기 때문에 이런 이례적인 기회를 마련해 본 것이다. <우슈피진>, <빅 화이트> 그저 따로 놓고 본다면 그리 큰 감동도 받을 수 없을 뿐더러, 그렇다고 장르적 특성상 웃음거리나 해학을 주는 블랙코미디적인 완성도가 높은 것도 아니다. 그 이유라 할 것이, <우슈피진>은 실제 주변 인물들에 자연스레 연기를 맡길 수밖에 없는 폐쇄적 공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간결한 주제가 갖는 식상함과 문화적 격차를 이겨낼 만큼의 흥미로운 볼거리를 아꼈기 때문이고, <빅 화이트>는 곳곳에 정도가 지나친 슬랩스틱 코미디를 달고 다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들을 이리저리 놓고, 또 캐릭터 등의 연관성을 찾아보면 바둑판의 흑돌, 백돌처럼 아름다운 형세를 이룸을 알 수 있는데 혹, 그간 실패라 치부해 온 내 삶의 패착이 무엇이었나를 복기하게 해주리만큼 알짜배기 궁합을 만들어 내기에, 여러분이 지향하는 인생관에 이들 인물의 삶을 투영해 보는 것도 추체험으로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는 생각과 더불어 유대교와 기독교의 세계관을 비교할 겸, 겸사겸사, 영화중매를 서게 된 이유로 갈음할까 한다.


유대교에서의 인간은 기독교에서처럼 완전타락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선한 경향성을 계속적으로 추구하여, 자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창세기를 해석함에 있어 기독교처럼 원죄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유대인이 믿는 메시아라는 존재는, 죄의식의 구원만이 아닌,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국방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그야말로 치세를 위한 존재로서, 흡사 동양의 ‘영웅’에 더 가까운 존재라고 여긴다. 그래서 유대인들 나름의 조건에 부응하지 않는 예수는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종교 간 인간관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손색없는 것이 바로 이들 두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우슈피진>의 모세와 그의 부인은 죄와 선행 사이에서 언제나 반목하고 괴로워하는 존재로서 자력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고, <빅 화이트>의 폴 바넬은 기독교의 아담이 그러했듯, 여자(부인)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되고 사함과 구원을 받을 기회를 모두 신께 떠맡겨 버리고 만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언뜻 모든 삶을 신의 뜻으로만 받아들이는 모세가 현실에 적응하는 데 있어서 더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심리적 죄의식의 구원에 관한 한 더 적극적인 인간관을 지니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인 모세는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자신만의 답을 찾음으로써 그간 시험에 들었던 자신을 스스로 구원해 낸다. 하지만, 바넬은 결국 동생의 생명을 담보로 죄의식에 거듭 사로잡힘으로써 구원의 길은 요원해 보인다. 그리고 두 주인공이 얻는 ‘돈’이라는 것에도 이런 세계관의 차이가 역력히 엿보이는 데, 주지하듯이 유대인 들은 ‘돈’을 긍정한다. 신이 주신 선물을 구입하기 위해 ‘돈’을 사용하고, 또 그것이 치세를 원활히 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아담 스미스에 이르러 ‘돈’과 ‘경제’를 종교적 죄의식에서 분리시켜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 종교적 윤리에 반하지 않음을 역설했듯, ‘돈’을 얻는다는 것과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에 아직도 영화 상으로나마 인식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영화적인 재미가 없어 이처럼 두 작품을 비교하며 관람해보면 어떨까 하는 의뭉스런 호기심으로 이 맞선을 주선했다지만, 적어도 <우슈피진>에서는 이제껏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유대인들(근래 반유대 정서가 팽배한 시기에)의 세계에 다가설 수 있는 기회가 될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오해마저 풀 수 있는 계기가 되는데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보인다. 잔소리 같지만 영화의 관람 포인트를 잠시 동안 만이라도 이쪽으로 틀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나마 별 상관이 없는 얘기를 또 덧붙이자면, <빅 화이트>에는 홀리 헌터의 팬을 위한 서비스로 담은 장면이 있는데, <피아노(1993)>에서 확고부동의 복선 및 상징 이미지로 쓰인 ‘도끼’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패러디의 재미마저 영화 내내 곱게 보이지 않았으니, 이는 홀리 헌터의 뛰어난 연기를 아까운 곳(뚜레 증후군)에 소진해버리고만 감독에 대한 아쉬움으로 남길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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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면서


‘언어에는 차이만 있다.’라고 한 소쉬르의 말에서 유추건대, 나로서는 문자로 남은 ‘토라’와 ‘성경’을 공부하고 거기에서 진실을 찾고자 하는 것이 무의미하게만 보인다. 나아가 신이 만약 존재한다면, 외연과 내포로 이루어진 불명확한 의사전달 매체인 ‘말(언어)’ 혹은 ‘문자’를 창조하지 않았을 거라 믿고 있기에, 인간들의 삶에 신을 끌어오는 것이 솔직히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법을 최대한 악용하는 삶도 긍정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불신과 무질서가 만들어 내는 외부불경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주인공의 삶 중 어느 것이 더 낫느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잘 대답할 자신이 없다. 그분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본다. 영화 두 편이 너무나 극적인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그저 두 주인공과는 달리 그런 일들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을 것만 같다. 유대인들은 인생이 힘들면 ‘탈무드’를 한 번씩 들여다본다는데, 나 역시 이들 작품을 핑계 삼아 ‘탈무드’를 한번 슬쩍 들여다보았다. 나름대로 지나칠 수 없는 잠언 몇 구절이 보였는데, 몇 자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상황에 의해서 명예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상황의 명예를 높이는 것이다.’


유대인이 사람을 평가하는 데는 세 가지 기준이 있다. ㉠ 키소 : 지갑을 넣는 주머니 ㉡ 코소 : 술을 마시는 잔 ㉢ 카소 : 인간의 분노. 이것은 돈을 어떻게 쓰고, 술을 마시는 법은 깨끗한가 더러운가, 인내심은 강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기준을 말한다(<우슈피진>의 주제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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