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도승근  (2006-03-22 01:41:03, Hit : 233, 추천 : 17)
제목  
   사라져야 할 또 하나의 언론 SBS
작년 언론노조 신학림위원장과 만났을 때 그는 이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언론으로 주저없이 조중동과 SBS를 꼽았었다.

언론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믿을만한 언론사가 거의 전무한 현실에서, 극우언론과 그것이 민족보수이든 자유주의 보수이든 보수언론이 장악한 딱 우리 정치수준에 걸맞는 구조 속에서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를 조건으로 판단한 듯 하다.

듣는 이에 따라서는 조중동이야 그렇다치더라도 SBS가 그렇게 해악적인 존재인가? 라고 갸우뚱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신위원장이 근거로 제시한 내용은 단순히 지배주주인 태영의 부도덕성이 아니라 지향하고 있는 방송의 내용들이었다.

어차피 연예오락전문방송을 지향하는 SBS가 지닌 민영방송의 한계를 감안한다면 시청자의 수준과 취사선택에 맡겨야 하지 않느냐는 반론도 가능할 수 있겠다.

그러나 철저히 수익구조에 매몰되는 민영방송은 이미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인식수준을 이용하여 자본의 집요한 수익구조 창출에 이용되는 시청자의 마비된 이성을 더욱 자유주의 기제로 묶어 둘 수단만을 강구할 뿐이다.

오늘자 나이트라인 논평은 SBS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 아주 적나라한 어조로 확인해주고 있다.

프랑스의 소요사태를 보며 '철밥통노조'와 '노동유연성이 없는 사회에서의 당연한 경제침체'  '이를 극복하려는 정부의 고민'등  그들다운 분석을 내어놓고 있다.
거기에 덧붙여 한국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도 슬쩍 언급하면서 결국 노조에 의한 노동유연성의 부족이 한계에 도달한 사회의 반면교사임을 강변한다.

논평을 담담한 어조로 전하는 '그'와 '그가 속한 방송'의 정체성의 판단은 사회구성원이 지닌 각각의 가치따위는 무시되어도 좋은 조건일 것이고 노동유연성은 더욱 강화되어 기업의 권력이 무소불위가 되어야 시혜 베풀듯 소모품인 노동자의 일자리도 많이 창출될 수 있다는 논리로 무장되어 있다.

그들이 설마 프랑스사회뿐 아니라 북유럽 대부분의 사회가 지닌 민주적 사회주의에 기반한 노동의 가치와 사회구성원 각각에 대한 권리보장의 조건들에 대해 모르지는 않을 것이며 사회내부의 이견과 충돌을 어떻게 소통시키고 극복해 왔는지에 대해서도 모를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착취해야 내 몫이 커지는 신자유주의의 속성을 교묘하게 포장하여 어리석은 대중들을 마취상태로 몰아 넣고 저항하는 세력들에 대한 거칠고 반국익적인 이미지를 끊임없이  생산해 냄으로써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피지배계급의 내분'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라져야 할 언론의 범주에 SBS를 포함시킨 이유가 조금은 이해가 되시는가!  



오늘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노조의 한 노동자가 15미터 다리위의 구조물에 올라가 현수막을 걸고 절규했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 450여일이 되도록 '불법파견이라는 부당한 노동탄압행위'가 있었음이 노동부에 의해 확인된 거대자본은 '배째라!'며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하이닉스매그나칩 자본은 1년여동안 매월 100억원가량을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당연한 요구를 묵살하고 탄압하는데 사용해 왔음이 드러나고 있다.  

어림잡아 1년여동안 수백명의 용역깡패들에게 지불하고 폐쇄와 감시장치를 설치하고 이리저리 언론을 회유하는데 들어간 비용만 대략 천억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상상이 가는가!

그 돈이면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노조원 전부를 복직시켜 33년동안 지불할 수 있는 임금총액에 해당하는 비용이다.

결국 아무리 많은 손실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조직화하여 권리를 주장하는 꼴은 못본다는게 한국사회의 자본들의 보편화된 인식수준이다.

정부는 방조하고 기업은 짜낼 수 있을때까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비틀어 짜내어 양극화의 꼭대기에 오래도록 버티고 설 수 있는 구조를 공고히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 지경임에도 '즐거움'을 주는우리 민영방송에서는 거침없이 '노동유연성이 부족한 사회의 한계'를 이야기하며 깨달음이 부족한 시청자들을 향해 의미심장한 교훈을 주고 계신다.

열명 중 여섯이 비정규직인 사회에서..., 1년이면 3천명의 노동자가 현장에서 죽어나가는 야만의 세상에 대고 노동유연성을 말하는 그 뻔뻔함이 부럽다.

아니 어쩌면 '제대로' 분노할 줄도 모르고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의식마저 제거되어 버린 '비아냥'과 '단순함'으로 무장한 청년들과 이미 자아상실의 뿌리깊은 노예근성이 몸에 배어버린 '늙은이'들이 과반을 넘어선 이 사회의 평균 수준에 아주 적절히 부합하는 언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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