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의 시대’를 지나, 완료된 디자인에 기능 꾸겨넣는 ‘욕망의 시대’로
“어차피 알맹이는 없다”는 정치적 체념과 냉소는 ‘스타일 전쟁’을 낳아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디자인하라, 아니면 사직하라(Design, or resign).”
1979년 영국 총리에 취임한 마거릿 대처가 디자인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영어 말장난이지만, 매우 심각한 말장난이다. 국가적 차원의 ‘디자인 전쟁’에 뛰어든 나라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디자이너가 기업을 구원하리라
미국 경제잡지 <포천>은 “BMW에서 디자인은 종교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런가? 애플에서 디자인은 종교나 다름없는 게 아니라 종교다. 아이맥에서 아이포드로 이어지는 애플의 히트상품들은 모두 디자인의 승리였다.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는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 맡기고, 기술자는 디자인에 따라 만들면 된다”고 했다. 잡스의 표현보다는 애플의 한국 쪽 경쟁자인 레인콤 경영진의 표현이 가슴에 더 와닿는다. 레인콤 경영진은 엔지니어팀장이 몇 번이나 찾아와 MP3 플레이어 제품 사이즈를 단 1mm라도 늘려줄 수 없냐고 요청하면 그때마다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고 한다. “꾸겨넣어!” 이미 완료된 디자인에 ‘기능’을 꾸겨넣으라는 명령이었다. 이젠 당연시되는 발상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레인콤 사장 양덕준은 “우리 회사의 경쟁자는 애플이나 소니가 아니라 조르조 아르마니”라고 했다. “아르마니가 경쟁 상대라는 것은, 레인콤이 디자인과 패션을 파는 업체라는 의미”라나. 그는 맥도널드는 햄버거 체인으로 알려졌지만 정작 수익은 콜라 등 음료수와 감자튀김에서 올린다는 걸 지적하면서 “맥도널드에게 햄버거가 감자튀김과 콜라를 팔기 위한 수단이듯 MP3 플레이어는 레인콤이 디자인·스타일·트렌드를 팔기 위한 매개체”라고 말했다. LG전자의 정보통신 부문 사장인 박문화의 생각도 비슷하다. 그는 “앞으로 휴대전화는 목걸이, 반지처럼 자신을 돋보이게 해줄 패션 액세서리로 진화할 것”이라고 했다.
왜 디자인인가? 애플의 산업디자인 부문 부사장인 조너선 이브는 “21세기는 디자인의 시대”라면서 “자동차 회사들은 더 이상 최고 주행 속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스와치사 시계가 얼마나 정확한가는 이제 화젯거리도 아니다. 가격의 패러다임도 지났다. 문제는 디자인이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활약하는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김영세는 “앞으로 피 튀기는 가격경쟁에서 우리 기업을 살릴 구원자는 바로 디자이너들이 될 것”이라며 “창의성을 좌우하는 우뇌가 발달한 것으로 알려진 한국인에게 디자인은 상당히 경쟁력 있는 분야”라고 평가했다.

△ 아이맥에서 아이팟으로 이어지는 애플의 히트상품들은 모두 디자인의 승리였다. 애플 매장의 디자인 역시 주력상품의 콘셉트에 맞게 만들어진다. (사진/ EP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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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가 없는 종교가 있을 리 없다. 아무도 원치 않는데 국가와 기업들이 디자인에 목숨 걸 리는 만무하다. ‘디자인 종교’의 기원은 1930년대의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급의 포화상태가 초래한 불황을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유인이 필요했고, 그 결과 디자인이라는 미학이 산업계와 손을 잡기 시작했다.
당시엔 신흥 종교에 불과했지만, 1970년대에 이르러 디자인 종교는 주류 종교로 떠오르게 되었다. 포드주의 대량생산 체제의 과다축적 위기가 극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른바 ‘포스트포디즘’으로 불리는 신축성 있는 축적 체제가 등장했다. 소비의 회전 속도를 높이기 위해 거의 평준화된 기능은 주변적인 것으로 밀어내고 패션산업의 감수성 변덕이 만들어내는 무한시장의 원리를 디자인의 이름으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는 광고라는 밥을 먹고 사는 미디어 산업의 이해관계와 잘 맞아떨어졌다.
100인 1색에서 1인 100색 시대로
‘디자인 종교’ 이전 시대가 ‘욕구(need)의 시대’라면, ‘디자인 종교’ 이후 시대는 ‘욕망(desire)의 시대’가 되었다. 디자인은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욕구의 수준을 넘어 그 이상을 추구하는 욕망 생산의 동력이 되었다.
홍익대 국제디자인대학원 원장 나건은 디지털 시대의 가장 큰 트렌드 중의 하나는 ‘개성 표현을 통한 자아 회복 노력’이며 사용자들은 ‘오직 나만을 위한’ 극도의 맞춤형 디자인을 원하기 때문에 “100인 1색 시대에서, 100인 100색 시대로, 이제는 더 나아가 1인 100색 시대!”라고 주장했다.
욕망 실현은 디자인과 이미지의 지배를 받는다. 최고 주행 속도에 대해 말하는 자동차 회사는 욕구를 파는 것이고, 억대의 명품 자동차는 디자인과 이미지를 판다. 아우디의 브랜드 이미지는 ‘진보’와 ‘개성’이며, BMW는 ‘역동’과 ‘세련’, 벤츠는 ‘중후’와 ‘우아’란다. 아직 욕구 충족조차 못하는 사람들에겐 그게 뭐하는 짓인가 싶겠지만, 한국에서 몸에 걸치는 명품에 집착하는 건 오히려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이라는 걸 감안할 필요가 있겠다.
‘디자인 종교’는 전 사회의 모든 국면에 파고들었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이 세계에서는 지역문화와 지역 정체성은 뿌리째 뽑히고 그 대신에 다국적 거대기업의 광고 디자인과 이미지 디자인에서 유래하는 상품세계의 상징들이 들어서게 된다. 디자인이 존재를 대신한다”고 개탄했다.
그러나 개탄은 사회학자의 몫일 뿐, 존재를 대신한 디자인을 추종하는 건 우리 시대의 선진적 행위로 여겨지고 있다. 심지어 서사로 먹고살아온 문학 세계마저 서사의 포화에 직면해 ‘저자의 죽음’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글쓰기는 점점 디자인을 닮아가고 있다.
몸도 재발견됐다. 몸에 대한 관심은 원래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적 논리와 정신 우위론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이젠 정반대로 몸 우위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몸은 디자인 과시를 위한 경쟁 무대가 되었다. ‘얼짱’과 ‘몸짱’이 되기 위한 보통 사람들의 질주가 시작됐고, 몸의 디자인 개조를 위한 미용·성형 산업이 각광받는 성장산업이 되었다.
정치도 디자인의 세계에 편입됐다. 정치 쪽에선 디자인을 가리켜 ‘스타일’이라 불렀다. 과거 스타일은 알맹이와 구별돼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속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알맹이는 그 누구에게건 어차피 없다”는 발견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른 체념의 지혜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평론가 케빈 필립스는 <부와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서구 유권자들은 경제에 대한 정치적이고 대중적인 통제권을 상실했다며 20세기가 민주주의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조금 다를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이미 분명히 달라진 건 스타일이 알맹이와 비교해 열등한 개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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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P3, 카메라 등의 기능을 앞세우며 히트를 치던 휴대전화의 시대는 갔다. 고만고만한 기능들을 얼마나 좋은 디자인에 ‘잘 꾸겨 넣느냐’가 문제다. 최고 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LG의 ‘초콜릿 폰’(왼쪽)과 삼성의 ‘블루블랙 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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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대 정치학 교수 버나드 마넹은 <선거는 민주적인가>라는 책에서 선거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사실상, 오늘날 정치라는 무대를 지배하고 있는 (혹은 점점 그렇게 할) 사람들은 그 사회의 진정한 반영이 아니다”라면서 선거가 엘리트 계급만의 밥그릇 싸움으로 전락한 현실을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은 단지 ‘새로운 엘리트의 부상과 다른 엘리트의 퇴조’일 뿐이라는 것이다.
당당하게 뻔뻔해진 사람들
이런 비판은 과거 귀족주의적 관점의 민주주의·선거 비판과 차원을 달리한다. 한국처럼 드라마틱한 사례를 보여주는 나라가 또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에 시작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명 서명 운동’을 상기해보라. 당시 직선제는 거의 종교였다. 직선제 개헌 추진 경남본부장이었던 최형우는 심지어 자신이 “분신자살까지도 계획하고 있다”며 전두환 정권에 방해 책동을 중단할 걸 요구했다.
20년 뒤인 오늘날엔 어떻게 됐는가? 직선제, 아니 선거 자체에 대한 냉소와 환멸의 기운이 온 사회에 퍼져 있다. 정부가 대학교수들에게 자치의 자격이 없다며 국립대 총장 선거를 선거관리위원회에 넘겨버린 사건 하나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서울대 총장 정운찬을 비롯해 많은 총장·교수들이 “전제정치하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며 펄펄 뛰었지만, 그 누구도 교수들이 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여왔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한 언론인은 정부의 조치를 비판하면서도 “편가르기, 인신공격, 흑색선전, 허위사실 유포, 반대급부 약속 등 학교 밖의 못된 정치판을 고스란히 흉내냈다. 지성인의 집단이라면서 초등학교 반장 선거만큼의 신뢰조차 보여주지 못한 사례도 적지 않다”고 꼬집었다.
정치 비판에 앞장서온 교수 집단의 민주주의 수준이 그 지경이라는 걸 모를 리 없는 대중이 과연 정치인에게 알맹이를 기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들이 스타일에 따라 평가하고 표를 던지는 걸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중은 어리석은 게 아니라 영악한 게 아닐까? 차라리 속 편하게 모든 기대를 접고 정치를 엔터테인먼트나 카타르시스 기회로 즐기겠다는 ‘합리적 냉소주의’가 아닐까?
산업계의 디자인은 ‘기능’이 충족된 이후에 득세했지만, 정치사회 부문의 스타일은 환멸에서 비롯된 냉소적 자구책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볼 수도 있다. 유력 야당 정치인이 직선제 쟁취를 위해 ‘분신자살’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절을 지나, 이제 우리는 대통령을 자유롭게 비판하고 조롱할 수 있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한때 한국인의 신앙이었던 민주주의가 ‘바로 거기까지’만을 의미했던 건 아니었겠지만, 거기까지의 프로그램밖엔 갖추지 못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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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선거에서 이미지 전략을 수행하는 ‘컨설턴트’의 능력은 선거의 향방을 결정짓는다. 부시 캠프의 컨설턴트이자 머리였던 칼 로브. (사진/ A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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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은 미학의 영역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미학이 정치학일 수 있다는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미학을 ‘권력의 담론’으로 보았다. 미학은 상류층만이 지니고 있는 자산으로 하층민들의 ‘타락한’ 취향과 그 하층민들이 선호하는 문화를 거부하고 폄하하는 데 사용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좀 지난 이야기다. ‘미학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과거엔 ‘촌스럽다’는 평가가 사람을 얼마나 주눅 들게 했던가. 하지만 당하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 촌스러움을 당당하게 내세우며 촌스럽다는 평가에 주눅 들었던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나섰다. 문화예술 분야에선 ‘캠프’니 ‘차브’니 하는 것들이 그런 흐름을 대변했다. 물론 이 흐름을 주도한 사람들은 ‘촌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들은 반란을 원하는 민심의 일각을 읽어내고 그걸 고무·찬양하는 데 앞장선 것이다.
이 기운은 문화예술 분야에만 국한되었던 게 아니다. 그 취지가 올바르게 전파된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염치가 없어졌다. 뻔뻔해졌다. 그것도 당당하게 뻔뻔해졌다. 그들은 그걸 ‘저항성 뻔뻔’으로 여기면서 자신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신념까지 갖게 되었다.
알맹이는 없다고 믿는 대중, 더 이상 속지 않겠다고 결심한 대중, 자신의 흠결에 주눅 들지 않는 대중이 주체가 되고 그들을 상대로 하는 민주주의는 ‘스타일 전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정치인은 대중의 엔터테인먼트·카타르시스 욕망에 봉사해야 한다. 그 대신 정치인은 권력이라는 전리품을 챙긴다.
대안은 ‘알맹이 꾸겨넣기’
승리는 알맹이인 동시에 스타일의 영역이기에 승리에 대한 집착은 더욱 강해졌다. 스타일 우위의 시대에 일관성도 예전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제 일관성은 알맹이의 일관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건 스타일의 일관성으로 대체되었다. 승리를 위해 어제 했던 말을 뒤집는다 해도, 지지자들은 승리를 위한 집념이라는 스타일의 일관성에만 주목하고 계속 지지를 보낸다.
세상에 대한 ‘인식 문법’이 달라진 것이지만, 기존 문법을 고수하는 사람들도 있기에 상호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건 이념 충돌도 아니고 세대 충돌도 아니다. 추구해야 할 명확한 알맹이 목표가 사라진 세상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이다. 누가 어느 편에 서는가 하는 것은 필연이 아니라 주어진 기회에 따른 이해관계의 결과일 뿐이다.
소통은 중요하지 않다. 각기 다른 스타일 취향이 꼭 소통해야 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소통을 통한 통합은 알맹이 위주의 발상이다. 알맹이는 사라지고 스타일만 남은 곳에선 각개약진만이 빛을 발한다. 분열의 시대가 도래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때마침 나타난 인터넷도 분열 혁명에 가세했다. 자신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충실한 오빠부대를 거느리는 것은 정치적 성공의 필수조건이 되었다.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건 포드주의 대량생산 방식처럼 시대착오적이다. 반감·비호감 세력은 걱정할 필요 없다. 그 누구도 감히 통합을 이룰 순 없기 때문이다.
이제 디자인과 스타일은 우리의 종교가 되었지만, 불행 중 다행인 건 알맹이는 각자의 디자인과 스타일에 맞게 꾸겨넣으면 그만이라는 사실이다. 역설이지만, 그래서 희망도 있다. 정녕 알맹이가 중요하다면 충돌은 알맹이를 둘러싸고 벌어지겠지만, 이제 충돌은 디자인과 스타일의 영역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디자인과 스타일에 파고들어 ‘알맹이 꾸겨넣기’가 진보를 위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