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끼사스 > 김애란을 읽는 어떤 방법 - 로즈마리님께③·끝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주말 어떻게 보내고 계신지요. 저는 오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화가들>전(展)을 보고 왔습니다. 이르면 19세기 후반, 늦어도 1940년대에 완성된 전시회의 작품들에는 시대를 무색케 하는 새로움이 가득했습니다. 빛이 규정하는 색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색으로서 빛을 규정하겠다는 대담한 역발상. 누군가는 순수미술의 효용을 묻는 모양이지만, 사실 대중들에게 익숙한 광고미술이나 상품디자인 같은 것은 몇십년전 이미 순수미술이 성취한 결과를 재활용하는 것뿐이라잖습니까. 호들갑스러운 위기론에 고초를 겪고 있는 순수문학 또한 후대에라도 기어이 찬탄을 받을 결실을 꾸준히 맺어가고 있다고 낙관해 봤습니다….

지난번에 이어 ⑥번과 ⑦번 작품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두 작품이 서로 닮은꼴이라고 봅니다.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⑥번은 주인공 모녀의 이야기와 끊임없이 달리는 아버지에 대한 상상, ⑦번은 '나'의 직장인 수족관에서 생긴 일과 괴수 '네시' 그리고 한 원시부족의 '휘파람 말(言)'에 대한 단상을 교차시킨 복선구조로 돼 있죠. 뒤에서 다룰 ⑧번과 ⑨번의 시원한 단선적 전개와는 구별됩니다. 또 ⑥⑦번은 이전의 다섯 작품과 달리 일찍이 가족 성원과 관계 단절을 겪은 주인공이 정체성을 구성해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⑧⑨번도 정체성 문제와 관련돼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자연스레 네 작품은 성장소설의 형태를 띠죠. 하지만 ⑥⑦번은 단절된 관계를 보충하던 환상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깨지게 되는 엇비슷한 플롯을 보여줍니다. ⑥의 '나'는 자신의 출생을 앞두고 가출한 아버지를 '끊임없이 달리는 자'로 상정하며 그의 귀환을 은근히 꿈꾸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습니다. ⑦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놀이공원에서 아들을 유기하는데 '나'는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네스호의 네시가 그렇듯, 메아리쳐 돌아오는 휘파람 말이 그렇듯 아버지와의 조우를 기대합니다. 환상의 균열에 부닥친 후 '나'의 대응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⑥⑦번은 이후 ⑧⑨번과의 유관성을 염두에 뒀을 때 최소한 작품집 속 김애란의 3년에 있어 전기가 되는 작품이라 여겨집니다.

제가 최고의 소설로 꼽은 ⑧⑨번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전에 앞에서 말한 바와 다소 겹치지만 ⑥~⑨번 작품의 유관성을 정리해보고 싶군요. 아까도 말씀 드렸듯 네 작품은 성장소설의 형식으로 쓰여졌습니다. ⑦번은 꼭 들어맞지 않는 듯도 싶지만 주인공들은 소위 '정상가족'에서 일정부분 혹은 전부가 결핍된 가족을 갖고 있고, 이 안에서 자신의 출생, 성장, 정체를 고민합니다. 이전 작품, 특히 ①②④⑤번이 보여준 지향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이 작품들은 자아보다는 관계에 대한 고민에 치중하죠. 그리고 작중 인물들은 김애란 또래 여성들의 페르소나라고 해도 좋을 만합니다. 수줍고 예민하며 때론 지나치게 신중한. 그에 비해 ⑥~⑨번은 대개 의뭉스러운 구석이 다분한, 성장기에 있는 '나'(모두 1인칭이고 남자인 경우가 많죠)를 앞세웁니다. 관계 속에서 자아를, 자아 속에서 관계를 모색하는, 그런 점에서 어느정도 완결된 자아를 상정하고 관계에 집중하는 전작들에 비해 변증법적 구성을 강화한 작품들입니다. 올해 우리나이로 스물일곱이 된 김애란이 자기 생활이 뒷받침하는, 자신있는 20대 여성 이야기 대신에 새로운 시점과 주제로 옮아갔다는 의미이고 이는 아마도 작가의 도전 내지는 성숙으로 이해해도 좋지 않을까요. 본의 아니게 ③번이 소외됐는데 제 눈에 이 작품은 김연수의 <꾿빠이 이상>이 그렇듯 김애란의 작가론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히는군요.

'한번도 지루하지 않'던 기다림이 '문득, 지겹다는 생각이 들'고만 ⑦번을 제외하면 ⑥⑧⑨은 그야말로 삶에 대한 유쾌한 긍정입니다. 가족을 배신하고만 아버지에게 달릴 때 눈 아프지 말라고 선글라스를 씌워주는 ⑥은 의젓하지만 ⑧⑨는 그야말로 웃음을 한껏 빼물게 하는 장난기로 가득합니다. 우선 ⑧은 서로 이해해 간다는 것에 관한 유쾌한 찬가입니다. '나'를 비롯한 3부자는 표현은 서툴고 괴팍하지만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간직한 이들입니다. 가족간이라도 관계란 끊임없는 오해의 연속이라 동생은 형을 비웃고,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체벌하며, 큰 아들은 훌쩍 집을 나가지요. 하지만 고장난 카세트가 멀쩡해지고, 아들을 위해 추위와 위험을 무릅쓰고 가로등 수리에 나서며, 고무동력기들이 꽃비 내리듯 우아하게 추락할 때 소통은 기적처럼 이뤄지고 가로등은 깜빡 꺼졌다 켜지면서 희열에 동참합니다. 너무 익숙해 비루하게까지 느껴지는 일상의 관계 속에 축제의 순간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음을, 김애란은 화사하게 보여줍니다.

작가가 데뷔 때부터 발휘하던 '보여주기'의 재능은 자못 무게감 있는 주제와 어우러져 더욱 빛을 발합니다. 그 절정은 ⑨번 작품이라 할 만합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 다들 한번쯤 물어봤을 법한 질문,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 낮에 먹은 복어국에 독이 있다는 아버지 말에 잠 못드는 밤, '나'는 기어이 아버지의 대답을 구합니다. 농담으로 일관하는 아버지의 대답 속엔 멋진 장면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해변으로 놀러간 아버지를 모래에 묻고는 친구들은 처음 만난 처녀들 앞에서 장난을 칩니다. 모래몸 위에다가 유방을 만들고 급기야는 거대한 페니스를 만든거죠. 처녀들만 없으면 한바탕 욕을 퍼붓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은 아랑곳않고 짖궂은 친구들은 모래 페니스에 불꽃놀이 막대를 꽂습니다. 피유우웅-. 화려한 불꽃들은 민들레씨처럼 밤하늘로 퍼져 나가고…. "바로 그 때 네가 태어난" 거고 그 무수한 씨앗은 코펜하겐에도, 스칸디나비아반도에도, 스톡홀름에도 퍼져 형제들로 자라났다고 아버지는 말합니다. 하하. 멋진 농담 아닌가요. 그런 판타지를 머릿 속에 그려보니 유쾌한 기분이 더했습니다. 어느 나라 시조의 출생신화로 삼아도 좋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도 해보고.

이쯤에서 나름대로 생각해본 '김애란 즐겁게 읽는 법'을 줄일까 합니다. 일전에 드린 서신에 로즈마리님의 혹평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는 얘기를 덧붙인 적이 있었죠. 짧지 않았던 글을 마무리짓는 지금도 그런 생각을 여전히 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김애란은 기대를 접게 하기보단 펼치게 하는 좋은 작가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군요. 3년 남짓한 작품활동을 토대로 할 수 있는 전망이란 한계가 있겠지만, 김애란은 어떤 신문기사의 인용구처럼 "할머니(박완서씨), 하나도 신기한 게 없어요. 우리는 평소 이렇게 말하고 써요"라고 치부할 만큼 가벼운 작가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문장과 훌륭한 '보여주기' 감각을 가졌고, 무엇보다 주제나 구성면에서 이야기의 깊이를 더할 만한 준비가 돼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죠.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제 서재 한 구석에 끄적였다시피, 동시대 작가들에 대한 평자들의 기본적 태도는 '낙관주의'와 '열광'에 방점이 찍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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