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끼사스 > 김애란을 읽는 어떤 방법 - 로즈마리님께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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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안녕하세요, 로즈마리님. 님 서재에 종종 들러 쓰신 글을 훔쳐 읽고 가곤 합니다. 님의 글에서, 뭐랄까, 매우 정직한 글쓰기를 하는 분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추상적 개념어를 빌어다 눙치는 식이 아니라 쉬운 어휘들로 꼼꼼하게 하나하나 짚어가는 글쓰기. 용례가 적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고졸(古拙)하다'-개인적으로 막연한 호감을 가진 단어입니다-는 형용사가 딱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들르겠습니다.
서재에 들러도 댓글조차 잘 남기지 못한 채 나오곤 하던 제가 이렇게 로즈마리님께 띄우는 서신의 꼴을 빌어 서평난에 끼적이는 것은 일전에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를 읽고 쓰신 서평을 읽은 까닭입니다. 평소 구사하는 어휘와는 달리 단호한 표현들을 동원해 "섣불리 고른 게 잘못"이라고 일갈하신 글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탓입니다. 당시 저도 김애란을 읽었고 독후감(感)을 어떻게 정리해 볼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죠. 평소 신뢰하던 평자인 님께서 제가 아직 접하지 못한 윤성희, 정이현 등을 거론하며 서릿발 같은 판정을 내린 걸 보곤 '내가 김애란을 읽고 받은 막연한 호감이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조심스러워졌습니다.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은 글쓰기 탓에 내실이 없고 허황되다, 80년대생 필자에게 기대되는 새로움이 안보인다, 그나마 봐줄 만한 게 문체인데 그것마저 1~2편 외엔 성공을 말하기 힘들다…는 평이었다고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니 김애란을 읽고 나서 회사 동료 R과 퇴근길에 나눴던 대화가 생각나는군요. 제가 "아… 꼼꼼한 취재 없이도 이런 소설이 나오는구나" 하고 허망한 듯 감탄을 말하니 R은 "김연수는 이거 읽고 '내 시대는 갔구나' 했다더라"하고 받아쳤습니다. 그 자리에선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음날 바로 <
A빠이, 이상>을 입수해서 읽었습니다. 김연수의 장탄식이 조금은 이해가 됐습니다. '본전생각도 들지 않았을까' 짐작도 해보고….
김연수가 분명하게-저같은 문외한은 막연하게- 느꼈던, 김애란의 '경험없는 소설'이 이룬 경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작가에 대한 제 막연한 호감과 님의 단호한 혹평의 연유를 가늠하는 잣대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맞고 그르다의 문제가 아님은 님도 너그러이 인정해 주시겠죠. 그저 저는, "한때 유행했던 하루키의 모방 그 이상은 아닌 듯하다"는 평가를 받아들이기 힘든 저는, 제 막연한 호감에서 김애란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어떤 방법을 끄집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과연 다음에 그녀가 보여줄 게 있을까"를 의심하기보단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손댈 엄두가 안나는 생각의 실타래를 천천히 풀어보려 합니다.
잘 풀릴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짐작할 수 없군요. 일단 소설집 <달려라, 아비>를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려 합니다. 대신 이번엔 페이지 번호 순이 아니라 개별작품이 발표된 시기 순으로 해보려구요. 아래와 같이 목차를 정렬해 보니 로즈마리님이 "개 중 제일 잘 된 소설"로 꼽았던 작품 번호는 ⑥번과 ⑧번입니다.
①노크하지 않는 집(창작과비평 2003년 봄호) ②나는 편의점에 간다(문학과사회 2003년 가을호) ③종이 물고기(창작과비평 2004년 봄호) ④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현대문학 2004년 5월호) ⑤영원한 화자(실천문학 2004년 가을호) ⑥달려라, 아비(한국문학 2004년 겨울호) ⑦사랑의 인사(문학사상 2005년 3월호) ⑧스카이 콩콩(문예중앙 2005년 여름호) ⑨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문학동네 2005년 가을호)
아참, 다음에 뵙기 전에 드릴 말씀. 김애란을 하루키의 추종자로 규정하신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듯 동의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은 문체에 대한 의견입니다. 저는 작가의 군더더기 없는, 문법에 정확한, 술술 읽히는 문장의 탁월함에 기꺼이 두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윤성희는 못 읽어봐서 뭐라 말씀드리긴 힘들겠지만 우리나라 소설가 중에 이렇게 깔끔한 문장을 구사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