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에게 부도덕한 이미지로 떠오르지 않는 마쓰시다와 혼다의 창업주들
삼성가나 LG가가 아무리 기를 써도 그들같은 영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한국과 일본이 비교될 때 언급되는 한 현상이 있다. 일본의 중간층이나 서민들은 대개 ‘재벌’ 내지 ‘부자’를 존경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좌파 진영은 물론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다소 보수적인 사람도 재벌에 대해 냉소적으로 “사기 쳐서 성공한 사람”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그렇다고 내 자식이 그 회사에 취직돼 일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냉소주의 시각에서 보면 사기를 치지 않고서는 어차피 이 사회에서 한몫을 차지할 수 없는 것이고, 성공한 사기꾼 밑에서라도 내 아이가 넉넉한 월급을 받고 안정되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뭔가 얻어먹고자 한다 해도 그를 김구나 이순신처럼 마음으로 깊이 모시지는 않는다. 보수적인 사람의 경우라도 ‘조국 근대화’의 공로를 박정희에게 돌릴지언정 이병철(1910~87)이나 정주영(1915~2001), 구인회(1907~69), 신격호(1922년생)에게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필요할 땐 정부와 각을 세우다

우리에게 재벌은 교활, 부정부패, 돈세탁 등으로 얼룩진, 서민들에게 멸시적이고 부도덕한 이미지로 떠오르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다르다. 일본 극우들이 최근에 도조 히데키와 같은 전범들을 영웅화한다 해도, 진보 성향이 아닌 다수의 보통 일본인들의 ‘존경스러운 현대사 인물’들은 전후에 수많은 가구들이 애용한 가전제품을 생산한 마쓰시타 재벌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1894~1989)나, 전후 소비 붐의 상징이 된 자동차를 만들어준 혼다 소이치로(1906~91), 1965년 미국의 우주선 아폴로에 부품을 제공해준 것으로 유명한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1932년생, 교세라 회장) 등이다. 일각의 기업인들이 ‘국민 스타’가 되어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어느 정도 획득할 수 있는 배경에는 복잡한 요인들이 있다. 한편으로는 나라를 폐허로 만든 전쟁 시절의 군부, 관료들이나 그 계통을 이은 전후 관료, 정치인들에 비해 ‘모두의 번영’을 위해 기여하는 것처럼 보였던 자수성가형 기업인들이 비교적 더 양호한 지도자로 비쳐진 측면도 있었다.


△ 일본의 재별 마쓰시타 고노스케(왼쪽)나 (사진/ AFP 연합) 혼다 소이치로(오른쪽)는 '국민스타'다. 반면에 우리나라 재벌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 (사진/ EPA)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한때 전투적이었던 노조를 무력화하고 여성·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주변화하는 과정이 언론에 의해 은폐되기도 했다. 그들과 일본 관벌의 유착이 잘 노출되지 않는 성공적인 언론 플레이 탓도 있지만 그들이 관료 자본주의의 수혜자이기보다는 정부의 ‘동등한 파트너’로 보였던 것이고, 또 그렇게 보일 만큼 필요할 때 관계와 각을 세울 줄 알았다. 그런데 일본 따르기로 유명한 한국 기업인들은 아무리 드라마까지 이용하면서 자신들을 ‘애국자’로 부각시키고 그들이 말하는 ‘반기업 정서’를 해소하려 노력해도 그들이 ‘한국의 마쓰시타’나 ‘한국의 혼다’가 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전후 일본인들이 생산과 소비의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졌다고 하지만 자본주의적 인식 내면화의 측면에서 한국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다수의 한국인들은 초인적인 노력으로 개천을 벗어나 계급 사회의 ‘용’으로 날아가게 된 성공한 인물에게 부러움과 존경을 느낄 것이다. 최근에 산산이 부서진 황우석 신화 만들기에는 국가주의적 ‘국위 선양’에 대한 욕망도 기여했지만, 명문고·명문대·일본의 대학까지 자신의 노력으로 간 부여 시골 농민의 아들 황우석의 인간승리적인 자수성가에 대한 존경도 한몫했을 것이다. 박정희가 만약 어려운 시절을 지낸 빈농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과연 박정희 신드롬이 지금처럼 극성 부릴 수 있었겠는가? 상당수 한국인들이 일본 군대나 국내외의 학벌 카스트 시스템을 통한 박정희·황우석의 신분 상승을 볼 때 일제나 학벌주의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무에서 유를 창조한 힘’을 흠모하게 된다. ‘생존, 성장, 성공’의 ‘3S 이데올로기’가 그만큼 압축 성장의 사회에서 도전하기 어려운 상식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영웅’을 이 정도 갈망하는 사회에서 아무리 삼성가나 LG가가 자기 홍보에 돈을 들인다 해도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천민 출신이 없는 천민자본주의의 상층부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무에서 유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의 유일한 예외라면 현대-한라 창업주인 빈농의 아들 정주영·정인영을 들 수 있지만 이것은 미군과의 관계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던 1940년대 후반~1950년대 초반에 형 정주영을 위해 미군의 수주를 따주었던 동생 정인영의 영어 실력 덕분이다. 한국 자본주의를 흔히 천민자본주의로 부르고 한국 자본가들의 노무관리·과시적 과소비에 대해 이 말은 틀리지도 않겠지만, 막상 한국 자본의 최상부에는 천민 출신이 거의 없다. 한국적 재벌의 상징이라 할 삼성가의 이병철 같으면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의 천석꾼 지주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지역 토호인 그 조상들이 그 지역을 지배하다시피 했다.


△ 지주가 소작인에게 거둬들인 곡물이 인천, 군산 같은 항구도시를 통해 일본으로 수출됐다. 보부상 중 일본 자본과 유착한 극소수만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와 지연과 혼맥상의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LG가의 구인회나, 일제시대 재벌의 상징이었던 <동아일보>-경성방직의 김성수(1891~1955), 김연수(1896~1979) 일가도 자신들의 지위를 자신의 힘으로 획득했다기보다는 ‘유생 토호’라는 전근대적 신분을 ‘자본가’라는 근대적 신분으로 성공적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그런데 신분을 지주에서 자본가로 탈바꿈했다 해도, 농장 소유와 소작인에 대한 살인적 착취는 이 한국 대자본 ‘선구자’들의 일제 때의 튼튼한 버팀목으로 남아 있었다. 한국 재벌들은 지금도 각종 자연농원, 연수원, 훈련소 등의 명목으로 부동산을 마구 사재기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소작료가 수확의 60~70% 정도이던 일제시대에는 돈을 은행에 맡기는 것보다는 은행 대부금으로 땅을 사들여 소작을 주는 것이 몇 배 더 큰 소득을 보장했다.

그러기에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챙긴 이병철이 대규모의 이윤이 나자마자 소출 1만 석의 김해평야의 알짜배기 농토 약 200만 평을 사들여, 전쟁으로 통제 경제로 넘어가기 전까지 소작인들이 내놓는 쌀을 일본으로 수출해 폭리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병철이 나중에 “하루 밤에 마산의 모든 기생을 한꺼번에 다 예약하는 풍류를 즐겼다”고 자랑스럽게(?) 회고했지만, 논 한 마지기에 소작료 15원을 내야 했던 소작인들은 과연 하얀 밥을 한 달에 몇 번이나 먹을 수 있었을까? 그가 1927년 도일 유학해 와세다대학에서 최신의 학문을 배웠을 때까지도 그의 고향집에서는 머슴들이 조선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종살이를 했다는 것이 당시의 반봉건적 현실이었다. 중세적인 토지 소유의 불평등이나 봉건적 인습들을 이용해 농촌의 자원을 독점하고, 식민 모국 일본의 은행에서 빌린 돈을 이용하고 일본 시장에 쌀 등 조선의 자원을 내다파는 대지주 계통의 예속 부르주아를 과연 무일푼의 식민지 백성의 대다수가 “개천에서 난 우리 민족의 용”으로 볼 수 있었겠는가?

암흑의 식민지 시대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는 궁색한 변명이 있지만 부정한 정권들과의 유착, 부정 특혜에 의한 기업 성장, 부동산의 무분별한 사재기와 지역적 인맥이나 혼맥에 의한 자기들만의 ‘이너 서클’(외부자들이 들어갈 수 없는 폐쇄적 사회) 형성은 그 뒤에도 일반인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한국 재벌의 특징으로 남아 있었다. 선택받은 극소수의 눈부신 ‘성공’은 관벌과 재벌의 ‘개발주의적 연합’에서 배제당해온 대다수 영세·하청기업인들에게 기회의 차단으로만 이어졌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재벌기업인들에 대해 냉소적이 될 수밖에 없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그들이 클수록 우리는 그들 앞에서 더 작아지고 클 수 있는 기회마저도 놓치고 만다는 의식 때문인 것이다.

그들이 클수록 우리는 더 작아지고…

이러한 상황에서 요즘 정권에서 이야기하는 ‘사회적 대타협’이 이뤄지려면 다수의 희생으로 축적된 재벌의 재산은 어떤 형태로든 일단 그 다수에게 먼저 환원돼야 한다. 부유세가 철저히 부과돼 부자들에게서 거둬지는 세금으로 무상 교육·의료 등 사회보장제도가 실행되고 삼성에서 노조가 만들어질 뿐 아니라 경영 참여까지 할 수 있다면 우리와 그들 사이의 동등한 입장에서의 협상이라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 ‘사회적 대타협’이란 말은 그저 있는 자들의 “빈자여, 서민이여, 희생하라!”는 요구일 수밖에 없다.

참고문헌:

홍하상, <이병철 경영대전>, 바다출판사, 2004

유인학, <한국 재벌의 해부>, 풀빛, 1991

김윤태, <재벌과 권력>, 새로운사람들, 2000

이종재, <재벌이력서>, 한국일보,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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