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프라하에서 60㎞ 떨어진 테레진 마을. 1941년 나치는 이곳에 유대인 수용소를 세웠다. 유대인 관리가 잘 되고 있다고 선전하기 위해 만든 ‘모범 게토’였지만, 사실 이 수용소는 아우슈비츠로 가는 중간 기착지였다.

거기엔 아이들도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우슈비츠에 자리가 나면 그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기차에 실려 갔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10살 전후의 아이들이 테레진으로 왔다. 그 수는 15,000명에 달했지만 단지 100명만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수용소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아이들을 지도했던 선생님이 그 중 4000점을 가방에 정리해 남겼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가는 기차를 타기 직전의 일이다. 그 가방은 이리저리 떠돌다 전쟁이 끝나고 10여 년이 흘러서야 세상을 향해 열렸다.

그렇게 세상에 알려진 테레진 아이들의 영문시화집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한참을 침묵해야 했다. 책을 한장씩 넘길 때마다 드러나는 절절한 사연도 마음을 울렸지만, 그 작품의 완성도에 놀랐다. 고작 10살 전후의 아이들이 물감과 종이가 없으면 주변의 식료품 봉지나 서류 봉투, 신문지 따위를 오리고 붙여서 만든 것들인데…. 테레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안네 프랑크가 살았구나….

이 책의 출간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다른 생각들도 꼬리를 물었다. ‘도대체 이 책을 누가 읽을까’, ‘우리 시장에선 남녀상열지사가 아니면 슬픈 이야기는 안 통한다는데’, ‘그 옛날에 유럽의 작은 도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관심이 있을까, 사실 그 때는 우리나라도 죽을 지경이었는데’, ‘세상에 이런 비극이 한두 번이 아니었잖아. 이런 시화집이 내 손에까지 온 것도 어찌 보면 유대인의 힘인데 내가 뭐 하러 맞장구를 쳐주어야 하나’

하지만 내 뇌리에 박힌 강렬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테레진, 희망의 노래>란 제목으로 책이 출간됐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다빈치가 낸 책 중 가장 안 팔린 책으로 남아 있다. 더구나 언론이나 미디어의 주목도 거의 받지 못했고, 단 한 명의 독자도 반응이 없었다. 책은 고스란히 창고에 잠겼다.

1년 후 표지 디자인을 바꾸고 제목을 <더 이상 나비들은 보지 못했다>로 바꾸어 재출간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나는 더욱 슬프고 참담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또 한 권의 책을 곧 출간하려고 한다.

도대체 왜 이럴까?

마지막, 정말 마지막/그렇게 선명하고, 밝은, 눈부신 노랑/태양이 흘린 눈물이 흰 바위로 떨어지며 노래한다면 그럴까//그렇게, 그렇게 노란 것이/가볍게 위로 휙 올라갔다/떠나 버린 것이 분명하다/세상에 작별인사 키스를 하고 싶어했으니까//일곱 주 동안 나는 여기에 살았다/이 게토 안에 갇혀서/하지만 이곳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다/민들레는 나를 부르고/뜰의 밤나무는 가지를 뻗는다/하지만 더 이상 나비들은 보지 못했다//그 나비가 마지막이었다/나비들은 여기 살지 않는다, 여기 게토에는(‘나비’전문, 파벨 프리에드만)

파벨 프리에드만은 1931년 프라하 출생으로, 1942년 4월 26일 테레진으로 이송돼, 1944년 9월 29일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 13살이었다.

박성식/다빈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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