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리?
한겨레
▲ 정희진 서강대 강사·여성학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불편하거나 ‘흥미진진’하다. 성폭력을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문제 제기하거나 남성 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은 인기가 없다. “여성이 남성의 성욕을 자극해서 성폭력당해야 한다면, 살의를 불러일으킨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하나?”, “여성은 왜 웃통 벗은 단정치 못한 남성을 강간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성폭력 가해자도 무서워하지만, 이런 질문을 하는 여성운동가도 무서워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성차별에 대해 말할 때, “제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접두어를 강박적으로 사용한다. 성폭력을 고발하고 분노하는 여성들은, 남녀 모두에게 ‘불쾌감’을 주기 쉽다. 한국 사회의 성폭력 신고율은 발생 건수의 2~6%에 불과하며, 성폭력 가해자의 70%는 아는 사람이며(어린이 성폭력의 경우 80%가 넘는다), 그 중 15% 내외는 가족 내 성폭행이라는 진실을 누가 듣고 싶어 하겠는가? 반면, 피해 여성을 비난하거나 피해 상황을 선정적으로 ‘즐기는’ 기사들은 조회 수 폭발이다.

최근 검거된, 100차례 이상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일명 ‘발바리’ 사건은 우리 사회가 성폭력가해자를 어떻게 보호하는지 잘 보여준다. 예전에도 상습 성폭력범이 ‘관악산 다람쥐’로 불린 적이 있다. 범죄 용의자를 익명 보도하는 것은 당연한 인권 보호 방침이지만, 성폭력 피해 여성이 사건 이후 겪는 사회적 배제와 고통을 생각하면 인권 개념의 보편성에서 여성은 분명 제외된 것 같다. 살인, 방화, 강간은 강력 범죄다. 살인이나 방화를 100번 저지른 용의자에게 ‘발바리’나 ‘다람쥐’같은 귀여운 호칭을 붙이는가? 연쇄 살인범은 ‘살인마’라고 하지만, 연쇄 강간범은 ‘강간마’라고 하지 않는다. 어떤 범죄를 100번 이상 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 권력이다. 절대로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며칠 전 30대 여성이 기지를 발휘해 성폭력을 모면한 사건이 있었다. 피해여성은 “지금은 몸이 아프니, 나중에 다시 찾아오라” 설득하면서 가해자에게 약속의 의미로 휴대 전화번호를 남기게 했고, 가해자는 검거되었다. 이 여성의 지혜는 감탄할 만하지만, 이 사건은 성폭력의 구조와 원인을 요약하고 있다. 어떤 범죄자가 범죄 현장에 기꺼이 자기 전화번호를 남긴단 말인가? 이런 사건이 가능한 것은, 가해남성이 성폭력과 섹스 또는 데이트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에 관한 한, 남성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모든 권리가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들에게 성은 남성 고유의 특권이기에,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없다.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X양 비디오’가 없다고 “장사 똑바로 하라”고 호통 치는 남성이 있는가 하면, 성 판매 여성에게 2만원 주고 원하는 체위대로 안 해 준다고 여성을 경찰에 신고한 남성도 있다. 이 남성들은 자신의 행위가 ‘현행법상 불법’인 줄 전혀 모르고 있으며, 성 구매자는 스스로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

‘발바리’ 사건과 관련해, “여성이 문을 잠그지 않고 자거나 낯선 사람을 집안에 들여 범행 기회를 제공했다”고 보도한 언론사가 있었다. 여성이 조심하라는 얘기다. ‘남의 집에 찾아간 낯선 남자’가 모두 강간범이 되지는 않는다. 모든 남성이 성폭력 가해자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여성은 성폭력의 공포에 떤다. 그렇다면, 성폭력 예방을 위해서 모든 여성이 조심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아니면, 남성들 중 극소수인 가해자를 신속하게 검거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기사등록 : 2006-02-19 오후 06:2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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