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 신화에 숨은 열여섯 가지 사랑의 코드
권혁웅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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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와 이름이 같은데, 주제도 약간 비슷하다.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인간의 삶을 이끌어가는 잠재된 힘의 근원을 욕망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사랑임을 고백하는 과정이 담겨져 있다. 시인이 신화 속의 사랑의 이미지를 색출하고 있다는 점이 무척이나 신선하고 새롭다.


 


신화와 꿈과 시의 테마는 언제나 사랑이다. 12p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고, 세상을 살만하게 만드는 유일한 힘이 사랑이라는 그가 내세운 주제의식은 사뭇 진지하다. 신화를 하나의 주제로 통합하려는 억지가 아니라, 코드 훔치기에 가까운 그의 해석에서 인간의 심연에 대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을 놓을 수 없는 재미를 던져준다.


 


신화에 숨은 몸의 논리를 분석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을 신화에 관한 정신분석이라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14p)


 


신화는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흥미롭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 사랑, 모험, 전쟁, 저주 같이 테마별로 신과 인간의 이야기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또한 신화의 변형과 유산이 현대에 남긴 것들을 역추적하는 책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로마 신화에 편중된, 어찌 보면 반쪽짜리 책들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동서고금을 마구 넘나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일본, 중국, 한국, 인도, 그리스-로마 신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까지 그 범위는 지구 전체이다. 세계 곳곳의 보편적인 사랑의 논리를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펼쳐 보인다


 


보이는 것은 믿음의 표현이었으며, 그 믿음은 주어진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려는 합리적 사유의 결과였다. 9p


 


저자에 대해서는 아는 것은 없지만, 신화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욕망과 이상, 억압과 자유의 모호성이 만들어낸 환상의 분출구, 그곳에서 펼쳐진 인간을 움직이는 근원에 대한 탐구, 그 중에서 사랑(몸의 논리, 감각의 논리)을 찾아가는 여정을 이토록 흥미롭게 펼쳐 놓다니 만물의 생명력, 오디세우스적 회귀, 영겁의 시간, 진리의 수레바퀴에 대한 저자의 자유로운 시각은 16개의 각 단락 모두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성애를 주제로 한 에로티시즘에 관한 글에서


에로티시즘은 영육과 성속의 경계 역시 무화시킨다. 에로티시즘은 육체로 정신을 초월하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의 문법에 의하면, 사랑한다는 것은 욕망한다는 것이다. 키냐르는 사랑이 젖가슴에서 나온 말임을 지적했다. 사랑(amor)은 젖꼭지(amma), 유방(mamma), 유두(mamailla)에서 유래된 단어다. 아무르(amour)는 말을 하는 입이라기보다는, 배가 고파 입술을 앞으로 내밀어 본능적으로 젖을 빠는 입 모양에 가까운 단어다. 사랑에 빠진 이는 사랑의 지고한 가치를 믿지만, 그걸 달성하는 방법이 육체 바깥에는 없다. 81p


 


창조에 대한 글도 흥미롭다.


신의 죽음이 세상의 탄생을 말하는 부분에서 태초의 살해는, 우리의 삶이 어떤 희생 위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다른 몸을 먹고 입고 디디고 산다. 우리는 삶을 가능하게 한 다른 생명에 대한 경외를 다른 신들의 죽음으로 표현한다. 251p


 


근친상간은 또 어떠한가.
신화에서 근친상간은 여신의 지위 하락과 관계가 있다. 가이아, 헤라, 아프로디테, 티아마트와 같은 대지모신이 제우스, 마르둑과 같은 남신에게 복속되면서, 여신들의 자리가 어머니에서 아내나 누이로 바뀌게 된 것이다.  어머니를 범하는 것은, 자식인 자기 자신을 낳는 행위이다. 이로써 제우스와 호루스는 영원한 탄생의 재귀적 사이틀에 들어가게 된다.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욕망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라, 어머니 품에 대한 생래적인 그리움이 모든 여성에 적용될 때 생기는 신화적 비약이다. 어머니에 다른 여성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모든 여성에 어머니를 적용한 것이다.


 


첫날밤도 자극적이다.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에서는 신데렐라의 신발이 이승과 저승을 잇는 출입구라 해석하였지만, 이 책에서는 '얼굴이 아니라 신발로 주인을 찾는다는 것, 이야기의 핵심은 속궁합에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흡혈귀 얘기에서는 밤에만 돌아다니며 초야를 탐욕하는 욕망의 덩어리로 묘사한다.


 


신화와 관련된 풍부한 도판이 이 책의 곳곳을 장식하고, 다양한 신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몸의 논리, 사랑의 이미지를 캐낸 시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보여지고 있는 것보다 감추어진 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시간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의 목소리를 담은 신화. 그것을 가까이 하는 우리는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만나게 될 것이기에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신화는 시적, 초일상적 이미지이다. 모든 시가 그러한 것처럼, 신화는 깊은 차원에서 상상된 것이지만 다양한 수준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아주 피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신화에서 국지적인 배경을 보지만, 가장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는 거기서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
<신의 가면> 조셉 캠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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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2-2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게 읽으셨겠는데요? 음...!

라주미힌 2006-02-20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인용이 너무나 많아질 것 같아 자제 좀 했어요 흐.. ㅎㅎ

2006-02-20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