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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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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에 대한 열망도 없고 좌파도 아니기에 책의 저류를 관통하는 계급근본주의가 거북스러웠음을 우선 밝힌다. 그러나 의회점유율 우파97% 대 좌파 3%가 나타내듯 압도적 우편향 사회에서 이런 목소리가 크게 공명해야 한다는 점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진보좌파정당이 의회에 진입한지 이제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이전 수십 년 세월 한국정치는 보수우파가 독점한 시절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비록 그 보수우파 진영 내에서의 강온의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 좌파의 목소리와 지분이 증대되어야 한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좌파정당에 대한 지지도는 비록 한자리수의 의회점유율보단 높지만 역시 10%대 수준에 머물 정도로 한국사회 힘의 추는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어 있다. 유명한 비유처럼 시소가 이미 한 쪽으로 완벽히 기운 상태에서 중간에 앉는 것은 균형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편파적으로 한 쪽을 지원해야 균형회복에 미약하나마 조력일 수 있듯이, 이렇듯 불균형적인 상황에서 중도를 지킨다는 것은 당연히 기계적 중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좌파 쪽에 서는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 더구나 제도권의 유일좌파정당이 정통좌파 아닌 단지 개량주의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묻고 있다. 평생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온 한국인이 이건희와 같은 동포인가, 아니면 비슷한 처지의 미국사람들과 동포인지를. 물론 현실세계는 이보다 중층적이고 복합적이지만 이 질문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가령 국제협력의 미명하에 여러 모임에 몰려다니며 시장근본주의의 확장에 열을 올리는 자국의 정치인-기업인들을 절망적인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상황은 외면하면서 부자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국의 정치경제적 강자들보다, 오히려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모인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서 보다 많은 공통점을 발견하고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이 이상할 게 없다.

이와 조금은 다르지만 중첩되는 관점에서 이라크전쟁을 본다면 이렇다. 그 전쟁에 미국과 한국의 지배층들은 의견을 일치해 전자는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감행했고 후자는 기꺼이 들러리가 되길 자처했다. 그런데 그 전쟁에 반대해 이라크 현지로 직접 떠난 한국인들이 있다. 그들에게 침략전쟁의 들러리가 되지 못해 안달하는 일군의 한국 사람들이 더 같은 부류인가, 아니면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하는 즉시 국가반역죄로 체포되어 중형에 처해질 것이란 경고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 위험한 곳으로 뛰어든 미국인들이 더 같은 부류이겠는가.


일군의 지식인들의 적절한 지적처럼 또한 애국애족의 미명하에 노동자 농민 등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공통의식을 불어넣기 위해 애쓰는 정치경제적 강자들은 그들 스스론 그 경계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들은 전형적인 세계시민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착취자들의 세계적 협력에 저항하기 위한 피착취자들의 세계적 연대가 준자동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강력한 수단으로 기능함도 이런 까닭에서다. 그래서 지배자들의 정교한 이데올로기인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에 의해 이것이 약화되는 현실은 진정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보는 한국사회가 당면한 최대의 적은 수구가 아닌 신자유주의다. 이것은 중요한 점을 가리키는데, 만약 수구가 최고의 문제라면 집권여당과 거대야당의 조그만 차이도 소중히 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최고의 문제라면 많은 공통점을 보이는 두 거대정당의 조그만 차이에 주목해야 할 하등의 필연은 없으며, 진보정당에 더 많은 힘을 실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련의 사건들은 극단적인 반공파시즘이 비록 전면에선 후퇴했지만 여전히 수면에 잠복중이고 수구세력들의 파워가 만만치 않음을 증명했다. 허나 수구로 전선을 한정하는 것은 그 못지않은 어쩌면 그보다 더 극복이 어려운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무방비로 맞이해야 함을 뜻하기에, 이 역시 양자를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좌파의 영역확장에 대한 지지로 이어진다.

과거의 진보경력을 발판삼아 현재의 진보를 비난하면서 보수로의 변신을 합리화하는 무리들, 개혁의 타이틀을 내걸었지만 전혀 개혁적이지 않은 무리들은 물론이고, 개혁만으로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개혁과 진보의 경계를 흐리는 무리들에 대한 경계도 여기서 도출된다.


한국사회 악의 진원지 중 하나는 극보수적인 한국기독교이다. 놀라울 정도의 종교적 배타주의로 무장한 한국기독교는 예수의 실제 생애와는 매우 동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오히려 예수가 비판했고 타개하고자 했던 무리들과 보다 유사하다. 실제의 예수는 여성주의, 생태주의 등 근대의 진보적 의제들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으며, 이는 강자와 부자를 편애하는 현 한국교회와는 너무나 다르다.

이런 주장에 공감하고 한국교회의 변혁필요의 당위에 동의하지만 기독교의 세계적 확장의 발판이 된 초계급적 보편주의에 대해 지나치게 경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계급에 무지무관심한 여성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저자는 그 스스로가 여성주의에 무지하거나 적대적인 진보주의자로 비치지 않기 위한 치열한 변호를 펼친다. 그 변호가 나름의 설득력을 가졌는지는 잠시 보류하지만, 자신의 딸을 대하는 태도 등 그가 제공하는 개인사는 가부장제에 젖은 많은 남성들에게 하나의 본이 되기엔 충분할 것이다.


사회주의를 지지하지 않고 좌파가 아니라 해도, 현 한국집권당을 좌파라 칭하고 한국사회의 좌경화를 우려한다는 저질선동이 먹혀들 정도로 보수우파의 강고한 패권적 지위가 크게 도전받지 않는 사회에서 이런 목소리들이 보다 크게 울려야 함이 당연하다. 이 상황에선 진보를 지지하는 것이 곧 중용의 도라 해도 그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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