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경태/ 한겨레21 편집장 k21@hani.co.kr
저는 화성 출신입니다.
경기도 화성이 아닙니다. 은하계의 별 화성입니다. 그래서 금성을 모릅니다. ‘금성에서 온 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들을 모릅니다. 여자들이 어찌 남자들의 깊은 뜻을 다 알겠습니까. 마초 흉내를 내려는 게 아닙니다. 이 지구상에서 남성에 관해 100% 이해할 수 있는 여성이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남자로 태어나지 않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답니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들에 대한 이해는 어떨까요. 아마 우주선을 타고 금성이나 화성에 직접 가는 것만큼 어려울 듯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동성애를 바라보는 태도는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답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톨레랑스가 넘치는 척, 전향적인 척 폼을 잡을 순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깊이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불편한 게 사실입니다. 이런 가정을 해봅니다. 만약 청소년으로 성장한 제 자식들이 커밍아웃을 한다면? 과연 기껍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제가 동성애자가 돼보지 않는 한, 그들을 1%의 편견도 없이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이번호 표지이야기의 주제는 동성애, 그것도 청소년 동성애입니다. 일부 독자들의 얼굴 찡그리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어린 자녀들이 있는 가정에서는 <한겨레21>을 몰래 숨겨놓을지도 모릅니다. 꼭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을 품었던 이들은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많이도 죽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도 그랬습니다. ‘문둥이’라는 멸시를 받으며 강제 이주당하고, 전쟁통엔 학살의 비극을 비껴가지 못했습니다. ‘변태’나 ‘호모’로 취급됐던 동성애자들은 집단학살의 역사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변태’나 ‘호모’ 같은 모멸적 꼬리표들은 ‘정신적 학살’의 효과가 충분합니다. 실제 이들에 대한 학살은 다른 형태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을 억누르는 거대한 편견은 어린 친구들을 고층 아파트 옥상으로 내몹니다.
10여 년 전 뇌성마비 장애인들을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뇌성마비와 정신박약이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흐느적거리는 몸놀림만으로 그들의 지능을 의심하고 바보처럼 여긴 셈입니다. 너무나 부끄러운 무지였습니다. 그래도 이건 약과입니다. 동성애 성향을 고백한 자녀를 정신병원에 처넣는 부모에 비하면.
무지는 때로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아름답다”는 말은 “안다”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서 낙관하라(그람시)”가 아니라 “본능으로 거부하든 말든 이성으로 학습하라”정도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