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벗에게,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성격으로 볼 때, 당연한 귀결일 수 있습니다. 보수는 이념보다 이권을 중심으로 모입니다. 진보는 이념을 중심으로 모입니다. 이권이 있는 곳에서 부패가 생길 수 있다면, 이념을 중심으로 모이는 진보는 서로 이념의 동질성을 확인하려고 하므로 분열의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사회를 볼 때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이 적용되지 않는 듯합니다. 보수는 부패로도 망하지 않는데, 진보는 그 백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부패로 지리멸렬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문시장을 보면 ‘수구는 선동으로 흥한다’라고 말해야 할 듯합니다.
시간이 지난 사안일수록 선동의 성격은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강정구 교수의 발언으로 빚어진 소란에서 조중동은 서로 뒤질세라 이념 공세를 펼쳤습니다. 동아일보는 “대한민국 자살을 강요하는 숭김파의 체제 물 타기 공세는 멈출 조짐이 아니다”라고 했고, 중앙일보는 “적화는 됐고 통일만 남았나”라고 했으며, 조선일보는 “가만히 앉은 채 당하느냐, 혼신의 힘으로 결사항전을 하느냐가 대한민국 세력’에 닥친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라고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 견해를 간직할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라고 했던 볼테르의 말을 되돌아보기엔 그들이 벌이는 선동의 수준은 너무 저질입니다. 선동에 고급한 게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지나치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전교조에 대해선 어떤가요? 전교조 죽이기에 앞장서는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전교조에게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훈계조로 말합니다. 조선일보가 애당초 ‘전교조의 초심’에 찬동했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고, 오늘 많은 독자들은 과거 조선일보가 “교사가 노동자냐?”라고 선동하면서 전교조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점을 잊고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전교조의 연가투쟁 연기에 대해 ‘여론 악화에 사실상 백기를 든 것’이라는 나름의 해석을 달았습니다. 그들의 수치 해석법은 71.4%의 지지를 전폭적인 지지로 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중앙일보라고 조선이나 동아와 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이렇게 다른 입으로 같은 목소리를 내는 조중동의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습니다. ‘밤의 대통령’이라던 조선일보와 중앙-동아의 선동은 국민이 그들이 꾀했던 대통령, 국회 구성과 다른 선택을 하면서 오히려 더 심해진 듯합니다. 놀라운 점은 그들의 선동이 저질이라는 점보다, 조중동이 꾀했던 정치구도와 다른 선택을 했던 국민과 시민사회가 조중동의 헤게모니를 계속 용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한국사회의 수준이라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젊은 벗이 그리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에선 조중동 헤게모니가 관철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조중동 헤게모니를 극복하지 않는 한, 젊은 벗이 그리는 사회는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회에선 적어도 ‘수구가 선동으로 흥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