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불교가 ‘애국 경쟁’을 벌이던 일본에서 사회주의를 발견한 승려들…주류 교단에서 마르크스를 멀리한 이유는 붓다의 진정한 정신을 잃었기 때문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폭력을 쓰지 않고서 얻은 재물로 자신을 안락하게 하는 동시에 남에게도 골고루 분배해 복을 짓는 사람, 재산을 탐내지 않고 재산에 미혹되지 않으며 재산 때문에 죄악에 빠지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근심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얻는다.”
‘천황 암살 음모사건’에 말려든 승려들
이 인용문은 나눔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오늘날의 사회운동가의 말이 아니라 초기 불교의 근본 경전인 <상유타 니카야>에서 따온 붓다의 말이다. 인간·사회 혁명의 사상가 붓다는 전쟁을 일삼는 군주와 재물을 나눠가질 줄 모르는 부자를 최악의 악인으로 파악하고, 생활이 곤궁해서 도적이 된 빈민들이 법망에 걸리더라도 벌주지 말고 생활비를 주어서 그냥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가난뱅이들에게 형벌을 주는 재판관을 나쁜 직업으로 생각했다. 지중해 세계의 원시 사회주의자라 불릴 만한 예수만큼이나 강렬한 것은 아니었지만 붓다에게 사유제도·국가권력은 사회적 죄악의 한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승려는 왕궁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하고, 칼 찬 사람에게는 설법하지 말아야 하며 몇 개의 필수품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거나 탐내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붓다의 제자들은 오늘날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스님까지 군에 끌려가서 살인 훈련을 받으니 칼 찬 사람에게 설법하는 것은 문제 설정조차 안 되고, 지배층·권력자들과의 접촉은 교단의 ‘문제’라기보다는 자랑거리다. 집착을 버려 고통에서 벗어나라는 해탈의 종교 안에서 학벌에 대한 집착에 의한 돈벌이, 즉 ‘대입 기도’가 거의 제도화된 지 오래다. 자본과 폭력에의 포섭 차원에서 불교에 비해 덜하지 않은 이웃 종교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면서 “우리만 그런 게 아니지 않느냐”라고 항변할 수도 있지만, 사회주의적 성격을 띤 종교가 돈과 권력의 포로가 됐다는 것은 부끄럽고 아쉽다. 사찰들이 장례식장이나 대기업 직원 훈련장으로 이용되는 등 종교적 서비스업으로 전락한 이웃 일본도 불교 자본화의 추태를 보이고 있다. 과연 동아시아는 붓다의 가르침과 국가·자본주의는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없었나? 국가와 자본에 맞선 불교 지도자들은 없었던가? 만약 있었다면 어떻게 제도권 불교가 지금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가?
일본의 초기 자본주의가 국내를 착취 공장으로, 동아시아 이웃 나라를 처참한 전장으로 만드는 상황에서 ‘국민’이라는 환상의 벽을 뚫어 국가·자본과의 투쟁에 나서는 스님들이 있었다. 일찍이 다카시마 베이호(高島米峰·1875~1949)와 같은 불교 개혁가들이 러일전쟁에 반대하면서 초기의 노동운동을 지원했으며, 우치야마 구도(內山愚童·1874~1911)라는 사회주의적 승려가 <평민신문> 초기 사회주의자 그룹의 일원이 되어 “군인들이여, 착취자 군대의 장교들에게 복종하지 말고 탈영하라!”고 외치는 등 급진적 반국가 활동을 하다가, 1911년에 경찰이 조작한 ‘천황 암살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불교 자체의 평등주의적 지향에 대한 각성도 있었지만 기독교계도 1920년대 조선의 진보적 기독교인에게도 잘 알려졌던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1888~1960)와 같은 기독교적 노조 활동가를 낳게 되니 참고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불교와 사회주의의 초기 만남은 현실적으로는 순탄치 않았다. 중산계급 사이에서 경쟁자 기독교의 확산을 우려했던 제도권 불교 세력들은, “외래 종교인 기독교보다 불교가 더 애국적이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1889년에 불교를 천황주의적으로 왜곡한 ‘존황봉불대동단’(尊皇奉佛大同團)이라는 이름의 어용 단체를 만들고 그 뒤 청일, 러일전쟁 때 종군 포교사를 보내 애국주의의 광풍을 일으키는 데에 적극 동참하는 등 기독교와 웃지 못할 ‘국가에의 충성 경쟁’까지 벌였다. 붓다 정신이라고는 안중에 없었던 그들은 당시 당국에 체포당한 순교자 우치야마 구도를 제적시키는 등 불교 사회주의 탄압의 선봉이 되었다.
세노 기로, 전향 뒤 폐인되다
제도권 집단으로부터의 고립을 두려워했던 다수 승려들의 ‘과격 사상’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차단됐지만 사회주의에 눈을 돌린 소수마저도 마르크스주의를 체계적으로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해 사회주의 사상을 순박한 ‘경제결정론’쯤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다 1920년대 이후 소련의 교조주의적 ‘반종교 운동’의 영향으로 불교를 도외시하는 일본 공산주의자들의 태도까지 생각하면 불교와 사회주의의 만남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상상이 간다. 식민지 조선의 역사를 보더라도 승려로서 일찍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1923년에 중국으로 망명한 뒤 무정부주의자가 되고 독립운동에 큰 공로를 세운 김성숙(1889~1969)의 경우에는 사회주의자가 된 뒤로 불교에 대한 탐구를 저버린 듯하고, 반대로 신간회(1927~31)를 이끌던 시절부터 공산주의자들과 절친해 ‘평등한 분배’를 지지하고 ‘불교사회주의자’를 자임했던 한용운(1879~1944)은 마르크스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불교와 사회주의라는 추구하는 공통점이 많아도 구조가 이질적인 두 체계에 감성적인 만남은 있어도 이성적인 만남·교류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까.
 |

△ 동아시아에서 국가와 자본에 맛선 불교 지도자들은 없었는가. 일본 교토에 있는 한 절에서 승려들이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다. (사진/ EPA)
|
불교가 어용화되고 사회주의가 ‘반종교 운동’에 물드는 지난한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의 붓다와 마르크스의 만남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한 사람은 일본 불교사회주의의 ‘대부’인 세노 기로(妹尾義郞·1889~1961)였다. 니치렌종(一蓮宗)이라는 국수주의적 종파의 출신으로 원래 마르크스주의를 혐오했던 그는 1920년대 중반에 농촌의 소작쟁의를 중재하면서 계급적 질서의 폭력성을 체험한 뒤 점차 “마르크스와 붓다의 뿌리가 달라도 민중 고통을 극복하려는 휴머니즘은 같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불령(不逞) 분자’의 딱지가 붙어 종단에서 쫓겨난 그는 1931년 4월에 “붓다를 모독하는 시체”인 기존 종단과 대립의 각을 세운 신흥불교청년동맹(新興佛敎靑年同盟)을 결성했다. 이 동맹은 소작인 쟁의·노동자 파업을 지원하고 사회대중당 등 진보정당과 협력하는 한편, 사상적으로 세노의 독특한 불교사회주의 철학을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불교의 연기법에 의거한 세노는, 착취·탐욕·고통의 사회를 나 몰라라 하고 입산해 해탈을 얻는다는 것은 뭇 중생이 서로 연관돼 있는 상의상관(相依相關)의 세계에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나’와 ‘남’ 그리고 ‘물질’ 과 ‘정신’이 하나인 불교의 가르침대로라면, ‘나의 정신적 해탈’의 전제조건은 ‘남의 물질적 해방’, 즉 착취의 철폐를 위한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사회 전체가 소유욕이 없고 민주적으로 운영됐던 붓다 생전의 승려 공동체처럼 사회주의적 형태를 띠지 않는다면 자비로운 보살의 입장에서 ‘나만의 깨달음’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법화경>의 행자 세노의 사회주의관이었다.
물론 일본이 파쇼화돼가던 시절에 이러한 단체를 경찰이 가만둘 리는 만무했다. “붓다와 같은 의지력을 키워 절대 전향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매일 했던 세노가 1936년에 체포돼 오랜 고문 끝에 전향을 선언했으며, 동맹의 간부·조직원들이 줄줄이 검거돼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전향 선언에도 불구하고 1942년 반 폐인으로 감옥을 벗어난 세노가, 여생 동안 “전향자로서 붓다와 동료들을 뵈올 면목이 없다”는 자괴감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고, 그를 ‘큰 바보’로 여겼던 제도권 종단들은 1980년대 후반까지 불교적 사회주의는커녕 전쟁에의 협력에 따른 책임 문제마저도 거론하려 하지 않았다. 과거 청산의 실패는 일본 종교계의 진보적 발전의 길을 원천 봉쇄한 것이었다.
사유제도에 대한 두 가지 깨달음
인간의 노동이 사유제도에 의해 인간으로부터 소외돼 상품으로 팔려 인간을 억압하는 자본 축적의 원천이 된다는 사회적인 고통의 순환을 파악한 마르크스와, 사회적 연관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인간의 탐욕·노여움·어리석음이 개별적인 인간에게 망상과 고통으로 돌아온다는 개인적 고통의 순환을 파악한 붓다…. 사유제도가 탐욕과 어리석음이 뒷받쳐주는 조작된 ‘사회적 합의’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마르크스와 붓다의 사고 방법·관심 영역·실천 방식이 아무리 달랐어도 궁극적·심층적 차원에서 보자면 그 둘은 도반(道伴)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제도권 종교계에서 이와 같은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거기에는 한용운이 ‘우주적 혁명가’라고 했던 붓다의 진정한 정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참고문헌
여익구, <민중불교철학>, 민족사, 1988.
모리나가 에이자부로, <우치야마 구도>, 論創社, 1984.
이나가키 마사미, <붓다를 등에 업고 거리로: 세노 기로와 신흥불교청년동맹>, 岩波書店, 1974.
이치카와 하쿠겐, <일본 파시즘 밑의 종교>, エヌエス出版社,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