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가 불타고 있다. 프랑스 파리 주변 빈민지역에서의 폭력사태가 1주일 이상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수도권인 ‘일 드 프랑스’ 지역에서 지난달 27일 이후 계속되고 있는 방화와 폭력 사태는 3일 시위대의 실탄발사로까지 이어졌다. 폭력사태는 4일 현재 20여개 소도시에 들불처럼 번진 상태다. 사태는 프랑스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들 사이의 정쟁과도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이다. 이번 사태의 배경으로 이슬람 이민자의 자식으로 태어난 젊은이들의 소외감이 폭발했다는 지적에서부터 중도우파 시라크 정권의 강화된 이민 및 치안 정책이 화를 불렀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소수자와 이민자에게 관대한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2등시민 차별에 분노 폭발-
“사람들은 나를 언제나 ‘알제리계 프랑스인’이라고 묘사하는데 어떻게 스스로를 완전한 프랑스 시민이라고 느끼겠어요?”
파리 북동부의 ‘일 생드니’에서 저술활동을 하는 나디르 던둔(33)이 영국 BBC에 전한 말은 이번 사태의 근저에 깔린 이슬람 2세들의 소외감을 대변한다.
진보성향의 프랑스 일간 리베라시옹은 ‘천민’이라는 좀더 원색적인 어휘를 택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내 보수층들은 이들을 사회의 병적인 존재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릭 말리에르는 빠르게 퍼져나간 이번 폭력사태의 원인을 실업계 고교 출신의 젊은 실업자가 느끼는 ‘공동운명체’에서 찾았다. 사건의 발단이 된, 경찰에 쫓기다 감전사한 2명의 젊은이에게 연대의식을 느꼈다는 것이다. 아울러 지금까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종교와 인종의 게토’가 폭발했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프랑스 정부가 ‘민감한 도시지역’이라는 이름으로 특별히 관리하는 빈민지역이 프랑스 전역에 751개가 존재한다고 전했다. 이 지역은 대부분 이슬람 이민자들의 거주지이며 실업률과 소득 면에서 전국 평균에 형편없이 못미친다.
-이민자 옥죄는 우파 득세-
‘평등한 시민’의 나라 프랑스에 사실상의 2등 시민이 존재하는 것은 프랑스인들의 자문화 중심주의와 소극적인 이민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장 루이 보를루 사회통합장관은 프랑스 2TV에 나와 “지난 수십년간 가난한 교외 지역민들의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BBC에 따르면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이 일 생드니 등 파리 주변 도시에 입주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다. 그러나 80년대만 해도 이 지역 인구 구성이 이슬람인 일변도는 아니었다.
프랑스 정부가 인위적으로 인구 분리를 추진한 것은 아니지만 백인들은 이 지역을 점차 빠져나갔다. 결과적으로 이곳은 이민자들만의 ‘게토’로 변해갔다. 정부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통합하려 하지 않았다. 서로 불편함을 끼치지 않는 한 따로 사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판단에서였다.
프랑스의 이민정책은 2002년 대선에서 극우 성향의 장 마리 르펜 국민전선 당수가 급부상하며 한층 보수화됐다. 다른 유럽국들과 보조를 맞춰 불법난민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이민자 수용에 대한 요건도 엄격하게 바꿨다.
정교분리라는 이유로 이슬람 학생들에게 히잡 착용을 금지한 것도 이민자들에게는 프랑스가 ‘우향우’한 것으로 비친다. 최근에는 유럽연합(EU) 헌법 비준 국민투표에서 ‘프랑스의 정체성과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이슬람국 터키의 EU 가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절반 이상의 공감을 얻었다.
-대권주자들 경쟁도 원인-
집권 여당 내 대권주자들인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의 보이지 않는 경쟁도 이번 사태 악화의 한 요인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들은 사건 발생 직후 서로를 의식하며 상반된 대응 자세를 보였다. 사르코지 장관은 “소요를 주도하는 부랑아들을 진공청소기로 쓸어버려야 한다”고 강경하게 발언하며 물리력 동원을 지휘했다. 그의 직설적인 발언은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너무 심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일단 대중의 주목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반면 경쟁자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드 빌팽 총리는 처음 닷새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는 사이 사태는 갈수록 심각해져 지난 1일에는 폭력사태가 10개 도시로 확산됐다. 두 사람간의 더 이상의 신경전은 ‘사사로운 권력욕심’ 또는 ‘행정부 내의 불협화음’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비판을 듣기에 딱 좋은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들은 사건 발생 엿새째인 1일 결국 서먹서먹한 분위기 속에 화해했다. 드 빌팽 총리가 감전사한 10대 청소년 2명의 부모들을 총리관저에 불러 위로하는 자리에서였다.
사르코지 장관의 초기 강경대처는 치안 강화를 원하는 기득권 세력의 점수를 딴 것으로 보이고, 드 빌팽 총리의 신중한 대처는 소수파 권익 보호를 주장하는 측의 점수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