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진주 > 장자의 싸움닭이 그립다

장자(莊子)의 "달생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싸움닭을 만들기로 유명한 기성자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왕의 부름을 받고 싸움닭을 훈련시키게 되었다.

열흘이 지나 왕이 물었다.
"이제 대충 되었는가?"
그러자 기성자는 "아직 멀었습니다. 지금 한창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열흘이 지나 왕이 또 물었다.
"대충 되었겠지?"
"아직 멀었습니다. 다른 닭의 울음소리나 그림자만 봐도 덮치려고 날리를 칩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 왕이 또 물었다.
"아직도 훈련이 덜 되었습니다. 적을 오직 노려보기만 하는데 여전히 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가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길 40일째 되던 날, 왕이 묻자 마침내 기성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젠 됐습니다. 상대가 울음소리를 내도 태도에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닭과 같습니다. 그 덕이 온전해진 것입니다(望之似木鷄矣망지사목계의, 其德全矣기덕완의). 다른 닭들이 감히 대응하지 못하고 도망쳐 버립니다."

살벌한 전의만 불사르는 것은 투계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이며 오로지 이기려는데만 목표를 두는 것도 도의 경지에 이른 모습은 아니다. 외연의 세계에 처연할 수 있는 경지야 말로 진정한 용사 투계로 거듭나는 모습이라고 장자는 나무로 만든 닭으로 '목계지덕'을 가르쳤다.

십 여 년이 흐른 뒤에도 다림질하면 최루가스로 날기침이 날 만큼 그 때 입은 옷들은 나의 청년기 한 토막에 "투쟁"의 이름표를 달고 있다. 난 원래 싸움 체질도 아닌데 세월이 더러워서 우리는 '386세대'를 마치 훈장처럼 달고 있다. 지금이사 밟으면 밟히고 때리면 기껏 눈물 콧물이나 훌쩍거리는 본연의(?) 약자의 모습으로 회복하였지만 어쩌면 내 속에도 그 날의 투혼이 꿈틀대고 있을 런지도.

그러나 불혹을 낼 모레 바라본다. 가끔은 정의의 이름으로 내 속에 있는 날 벼룬 칼을 꺼내들고 싶을 일도 있을 수 있겠으나 지금 같아서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싸움 없는 세상이 내가 지향하는 바이지만 사람 사는 풍경이 어디 매번 그러한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겠거니 하며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온 몸으로 맞아야할 나는 이승사람이다.

그래도 아쉽다. 나야 뭐 어차피 "맞은 나도 이렇게 아픈데 때린 그 손목때기는 을매나 더 아플꼬."같은 성자 흉내라도 내는 것이 쌈닭 되는 것보다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지만(그래서 애시당초 쌈 잘 하긴 글러먹었지만), 투계판에서 목계지덕을 갖춘 닭을 여간해서 볼 수 없다는 게 아쉽다. 도의 경지에 오르진 않았더라도 최소한 싸움의 도가 뭔지는 들어본 그런 투계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서글프다. 일방적인 언사로 소통 자체가 되지 않고 주어들은 건 많아서 궤변이나 그럴싸하게, 목적은 오로지 상대방이 피를 철철 흘리는 걸 볼 때까지 쫀 데를 또 쫄 뿐이다.

어디 기성자같은 사부가 없을까? 그 닭도 알고보면 좋은 기질도 많을 텐데 아직 가르침이 부족하고 수양이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만약 처음부터 쌈닭이 아니라면 푹 고아서 원기 부족한 날 몸보신으로 삼았으면 좋으련만......

/051027 폐계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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