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드무비 > 숨어 있는 책방

어제 저녁 무렵 갑자기 나를 찾아온 허기는 돼지 한 마리라도 통째로 삼킬 만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나는 나자신에게 몹시 불쾌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지?

안창살이 먹고 싶었다. 무조건!
나의 욕망은 이렇듯 구체적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아이를 데리고 기찻길 옆 고깃집으로 갔다.
하시라도 고기를 마다하지 않는 남편을 만난 건 또 얼마나 행운인가!

고기와 소주로 오랜만에 포식했다.
불콰해서 좁은 골목을 걸어 나오는데 조그맣게 불 밝힌 헌책방이
눈에 띄었다.
-숨어 있는 책

깔끔한 헌책방이었다.
대강 훑어봐도 사고 싶은 책이 사과 박스로 한 박스는 족히 되어 보였다.
예전에 재밌게 읽은 책인데 거기 있는 게 반가워서 빼보았더니, 이런 우연이 있나,
저자가 내 친구에게 자필로 서명, 증정한 책이었다.
무슨 연유로 그 소중한 책이 이 집 책꽂이에 꽂혀 있을까?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사연을 물어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나저나 난 왜 요즘 걸핏하면, 추호도 없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까?).

헌책방 하면 영화 <해피 엔드>에서 무직자 최민식이 대낮에 죽치던 공간으로 인상깊은 곳이다.
그런데 나에겐 극중 최민식만큼이나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

부산 보수동은 헌책방이 밀집된 곳으로 서울의 청계천만큼이나 유명한 곳이다.
나는 인생의 한때 그 수많은 헌책방 중의 한 곳인 <우리 글방>의 주인에게 반하여
뻔질나게 그곳을 출입하였다.
창백한 낯빛의, 소심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그 주인 남자가 내 인생의 짝인 것만 같았다.
<껍데기는 가라>의 신동엽 시인이 부인 인명진 여사를 만난 곳이 그가 경영하던 헌책방이었다는 사실을
어느 책에서 읽고 나는 더욱 심증을 굳혔다.

그런데 그가 어쩌다 내가 데리고 간 후배에게 반해 버린 것이다.
그 후배는 책을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인생에서 제일 민망한 순간 중의 하나는 내가 일방적으로 봐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관계나 어떤 일에
스스로 배반당하는 그때가 아닐까?

그 후 나는 헌책방에 오래도록 발길을 끊었다.
다행히 취직도 하고 형편이 좋아져 나는 월급을 타면 무언가에 복수라도 하듯 책들을 사들였다.
빳빳한 새책으로.
내 책꽂이엔 아직까지 읽지 않은 그렇게 한동안 사들인 책들로 수두룩하다.

어제 만난 그 헌책방은 기억할 만한 마주침이었다.
고기와 술을 너무 포식한 탓에, 아무리 헌책이라고는 하나 내가 살 수 있었던 건 대여섯 권에 불과했다.
내 친구의 책꽂이에서 흘러나온 그 책도 물론 포함된다.

밀린 아르바이트비가 얼마간이라도 입금되면 나는 튼튼한 배낭을 메고 그곳을 다시 찾을 생각이다.

----------------------

2002년 5월에 쓴 글,   이 글은 기사로 채택이 안 되었다.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어 물어봤더니 '함량 미달'의 글이라고......

어느 님이  "흐흐, 술 한잔 하고 쓰셨군요!" 하고 댓글을 달아놓았는데 그게 그렇게 위로가 되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딸기 2005-10-27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기사에 채택이 안 된건지 모르지만, 재밌는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