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공산주의자의 향기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지금 읽어봐도 예리하게 ‘이광수 파시즘’을 비판한 1930년대 논객 김명식
비판적 학문 업적에 비해 문집이나 평전 하나 없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

글쓰는 사람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라면 ‘독자를 얻지 못하거나 잃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조선의 19세기를 빛낸 다산 정약용(1762~1836)과 혜강 최한기(1803~79)는 생전에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못한 비주류였지만 지금은 조선 철학의 진취성과 잠재력의 상징이 되었다. 독일의 19세기를 빛낸 쇼펜하우어(1788~1860)나 니체(1844~1900)의 강의에 학생 몇명밖에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놀랍기만 하다. 글쟁이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동시대인들에게 외면을 당하는 것보다는, 미래에 시대적 의미를 잃어버린 작가로서 역사 속에 묻히고 마는 것일 것이다.

정약용과 쇼펜하우어의 시대성

특히 특정 이데올로기의 범주에서 글을 쓰는 이들은 그 이데올로기의 퇴조 이후에 빨리 잊혀진다. 가령 지금 박은식(1859~1926)이나 장지연(1864~1921)의 글들을 애착을 갖고 찾는 독자들이 몇명이나 되는가? 그러한 독자들이 없는 이유는 당시의 개화주의적 주장들이 지금은 답답한 훈육주의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1980년대의 ‘신식민주의’의 분석들도 더 이상 유용해 보이지 않는다. 한때에 소비됐다가 유효기간이 만료되면 폐기되는 것이야말로 글쟁이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근대적 글쓰기의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범주에서 쓴 수십년 전의 글이 지금에 와서도 현 시대 논객들의 글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 경우들이 있다. 대개 그러한 글들은 이데올로기에 맹목적으로 몰두하기보다는 그 틀을 구체적인 사회 현상의 분석에 적절히 이용하는 실사구시적 냄새가 나는 논저들인데,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현상에 대한 비판이라면 마치 오늘 쓴 것인 양 읽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즘 전문가들도 잘 모르는 1920~30년대 공산주의적 사상가 송산 김명식(松山 金明植·1890~1943)의 ‘이광수 파시즘’에 대한 글을 읽어보면 70년 전에 쓴 글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시의성을 과시할 수 있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다.


△ 김명식은 1999년에야 애족장 포상을 받았다. 1990년대 후반까지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에게 포상 신청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광수의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1910년대에 ‘우매한 민중을 계몽할 사명’을 맡을 신지식인 엘리트의 역할을 강조했던 전형적인 부르주아 계몽주의자인 이광수는 <민족개조론>(1922)에서 ‘노동자의 파업과 반란을 낳아 위기로 치닫는 서구의 자유주의·개인주의·무정부주의적 경향’을 질타하고, ‘이기적이고 나태한 겁쟁이’인 조선 민중이 엘리트 지도자에 의해 집단에의 봉사정신을 익혀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조선 민중이, <우덕송>(牛德頌, 1925)에서 이야기한 ‘무거운 멍에를 지고 밭을 갈았다가 나중에 인간에게 살과 피, 가죽을 주면서 죽는 성인(聖人)과 같은 소’와 같이 지배자들을 위해서 살고 죽는 우민(愚民)이 되어야 함을 비유적으로 주장했다.

‘강력한 민족’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중이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이광수의 <지도자론>(1931)은 공산주의 이론가 김명식에게서 비판의 화살을 맞는다. 김명식의 이광수의 비판(<삼천리>, 1931년 9월) 논리는 참으로 명쾌하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민족 전체를 계몽·지도하겠다”는 사람은 결국 지배자를 위해 절대 다수의 이익을 짓밟을 텐데 그건 계몽·지도가 아니라 지배다. 피지배자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관심도 없이 자본가 위주로 만들어진 ‘민족’의 미래를 들먹인다면 극히 폭력적인 지배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경주에 가서 다르게 생각해보라

이에 이광수가 반박문을 쓰고 흥분했지만 몇 개월 뒤 김명식의 비판 제2탄(‘영웅주의와 파시즘’, <동광>, 1932년 3월)이 날아와 이광수의 정체가 더 확실히 드러난다. 이광수는 힘이 바로 정의라며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친 초강력의 집단의 힘을 찬양했지만, 김명식은 역사적 진보의 논리를 따르는 힘만이 정당할 수 있으며 해방을 구하는 노동자들을 학살하고 인권·자유를 짓밟는 힘은 반역사적 폭력일 뿐이라 못박았다. 또한 유럽·일본, 조선의 부르주아들까지도 피지배민의 해방 투쟁에 맞서 폭력을 찬양하는 것은 그들에게 역사적 위기가 닥쳐왔음을 보여준다는 것이 김명식의 논리였다.

민중을 ‘지도자’ 중심의 재벌 집단의 ‘세계적인 성공’에 열광하고, 허울 좋은 ‘2만달러 소득의 동북아 허브’ 시대의 도래를 기다리는 소와 같은 존재로 만들려는 자들이 아직 많아서일까? 70년 전 그의 글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광수가 숭배한 이순신에 대해 과연 거북선 제조가 이순신의 천재성 덕분일까, 당대 조선의 기술적 수준의 반영이 아니었을까라는 김명식의 반문을 읽을 때, 수많은 조선 기술자와 병졸, 의병에 가담한 농민·노비 등을 외면한 오늘의 영웅주의가 부끄럽게 느껴진다.

김명식은 “이순신이 나타나지 않아 조선이 일본이나 명나라의 지배에 들어갔다 치자. 그렇다고 피착취 민중의 형편이 조선왕조가 지배할 때보다 크게 나빠졌을까”라고 되묻기도 한다. 민족주의적 통념으로는 거의 독신(瀆神)에 가까운 이야기다. 민족주의적 ‘상식’으로 민족 멸망 이상의 재앙은 없다. 그런데 농민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김명식은 “경주의 화려함을 볼 때 신라 노예들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을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7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경주에 가서 무엇을 보고 생각하는가?


△ 이광수(오른쪽)는 근대문학의 창조자 반열에 올라 있는데 그를 비판한 김명식은 현재 좌파 지식인조차 잘 모른다. 김명식과 활동한 김철수(왼쪽)역시 최근에 서훈됐다.

그러나 역설 중의 역설은 파시스트 이광수가 지금 누구나 아는 ‘근대 문학의 창조자’ 반열에 올라 있는 반면, 그의 예리한 비판자 김명식은 현재의 좌파적 지식인들조차 잘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제주도의 진보 인사들에게는 제주시 근처의 조천리에서 100년 전 양반 유지의 가정에서 태어나 1940년대에 낙향생활을 하다 고향마을에서 서거해 묻히게 된 김명식은 ‘제주 진보운동의 명사’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독립운동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조국 해방을 위해 신학문을 배우겠다”는 결의로 일본에 건너가 이광수 등과 함께 와세다대학에 다녔다가 국제주의적인 반제국주의 단체인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1916)을 만들고 그 뒤 조선 최초의 본격적인 공산주의 조직인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1920)의 창립 멤버가 되었고 <신생활>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혁명 사상의 대중화에 뛰어들어 혁명적인 글들을 게재한 죄(?)로 일제 당국으로부터 식민조선 사상 최초의 ‘필화 재판’(1923)을 받아 형살이를 한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김명식을 알 것이다.

말년의 타협은 아쉬움 남겨

그런데 고문, 가혹한 감옥 노역, 말라리아로 1920년대 중반부터 거의 귀가 먹어버려 걸어다니기 힘든 병자가 된 김명식이 그 뒤 극단적인 가난 속에서 투병생활을 하면서 쓴 수십편의 당대를 떠들썩하게 한 뛰어난 논저들이 아직도 문집으로 묶이지 않고 있으며 김명식의 평전 역시 쓰인 일이 없다. 이제 안재홍(1891~1965)과 함께 1930년대의 최고 논객으로 꼽혔던 김명식에 대해 현대인들은 거의 모르게 되어버렸다. 이와 같은 무지가 강요된 것은, 그 사상이 지금도 불온하게 느껴질 만큼 이 땅의 지배자들의 이면을 잘 파고들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황천으로 떠난 김명식으로서 어쩌면 행복해할 일이다. 그 시대의 수많은 다른 글과는 달리 그의 글은 아직도 쓸모있기 때문이다.

물론 김명식에게도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소련이 파시스트 독일과 야합해 그가 유럽의 조선이라고 여겼던 폴란드를 분할 점령함으로써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을 실망시키는 등 암흑의 상황에서 일제의 극심한 감시에 시달리던 말년의 김명식이 어려운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 창씨개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氏制度 창설과 鮮滿一如’, <삼천리>, 1940년 3월) 등 쓰지 말아야 할 글을 쓴 일이다. 자신을 끝까지 마르크스주의자로 부르고 개인적으로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죽으면서도 “해방될 때까지 내 사망신고는 하지 말라”고 하는 등 나름대로 지조를 지킨 그가 이와 같은 종류의 타협으로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상상이 간다. 인간이었을 뿐인 그도 당연히 완전무결하지는 않았지만 극빈 생활과 투병의 고통 속에서 조선의 현실에 대한 진보적인 비판을 해온 그를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요즘 좌파적 독립운동가들에게 서훈을 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지만 형식적인 서훈보다는 그들의 훌륭한 사상을 오늘의 입장에서 해석·이해하고 더 많이 알릴 수 있는 계기로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나 싶다.

참고문헌

김철, 신형기 외 지음, <문학 속의 파시즘>, 삼인, 2001.
박종린, ‘한국의 사회주의: 인물(1) 꺼지지 않은 불꽃, 송산 김명식’, <진보평론>, 제2호, 1999.
박종린, ‘김윤식사회장 찬반 논의와 사회주의 세력의 재편’, <역사와 현실>, 제38호, 2000.
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역사비평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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