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빛보다 빠르다
찰나를 쫓는 생물의 무한 진화
| 글 | 김상연 기자ㆍdream@donga.com |
빌 게이츠는 6년전 “생각의 속도로 움직이라”고 주문했다. 감탄하기 전에 잠깐. 생각의 속도는 얼마나 빠를까. 생각은 뇌가 하고, 뇌는 신경세포로 이뤄져 있다. 신경의 속도는 초속 30m. 100m를 3~4초만에 뛰는 셈이다. 생명체는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찰나의 순간 속에 살고 있다.

연세대 화학과 김동호 교수는 ‘식물이 빛을 잡는 순간’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1997년 과학기술부의 초고속광물성제어 창의연구단을 맡은 이후 지금까지 8년동안 녹색잎 안에서 벌어지는 빛의 경주를 쫓고 있다.

잎에 있는 엽록체가 빛을 흡수해 에너지를 만든다. 엽록체 안에는 엽록소라는 반지 모양의 분자가 수없이 많다. 바깥쪽 엽록소가 빛에서 나온 에너지를 수건 돌리듯 자기들끼리 전달한다. 에너지는 어느 순간 안쪽 엽록소로 전달되고 그곳에서 식물이 쓸 수 있는 에너지로 바뀐다.

“엽록소가 에너지를 전달하는 시간 중 가장 짧은 것은 수백 펨토초에 불과합니다.”
눈 깜박할 사이가 0.1초니 이보다 대략 1000억분의 1 정도나 짧은 순간이다. 이토록 짧은데는 이유가 있다. 에너지를 전달하는 시간이 짧을수록 손실이 적어 효율이 올라간다. 생명체가 지구에서 ‘가장 효율적인’ 광합성을 하게 된 것도 이 같은 찰나의 반응 덕분이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이런 현상은 아무리 두 눈을 치켜 떠도 볼 수 없다. 대신 김 교수 옆에는 ‘펨토초 레이저’가 있다. 이 레이저는 찰나를 볼 수 있게 하는 마법의 거울이다. 김 교수는 “식물의 찰나를 모방하면 인공 광합성 분자로 초소형 태양전지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생명체의 빠르기 경쟁

연세대 김동호 교수는 찰나에 벌어지는 광합성을 모방해 인공 광합성에 도전하고 있다.
왜 생명체는 찰나보다 빠르게 행동할까. 현기증이 나서 어지럽지나 않을까. 서울대 생명과학부 강봉균 교수는 “생존하기 위해서”라고 단언한다.

생명체는 지구에 처음 등장한 이후 38억년 동안 ‘빠르기 경쟁’을 펼쳤다. 느리면 잡혀먹는 세상에서 빠른 생명체는 생존경쟁에 유리했다. 줄행랑 치기 챔피언인 바퀴벌레는 감각기관이 정보를 얻은 뒤 행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0.001초에 불과하다. 1초에 25번이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바퀴벌레는 지구의 역사에서 무려 3억년이나 생존하고 있다.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류성호 교수는 “특히 생체 내부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빠른 동물일수록 행동을 재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어 더 잘 살아 남게 됐다”고 설명했다. 인간은 특히 뇌와 신경의 커뮤니케이션 속도, 즉 생각의 속도가 가장 빠른 동물인 셈이다.
우리 몸 안에서 가장 노동에 시달리는 구조물이 세포의 ‘이온 통로’(이온 채널)다. 바삐 움직이다 보니 가장 빠른 녀석이다. 매운 고추를 먹으면 우리는 맵다고 느낀다. 혀에 ‘매운 맛’을 느끼는 수용체가 있기 때문이다. 고추 속에 있는 ‘캅사이신’이라는 물질이 세포막에 있는 매운맛수용체에 달라붙으면 수용체가 뇌에 ‘맵다’는 신호를 전달한다.

실제로 매운맛수용체에 캅사이신이 붙으면 수용체가 마치 터널 같은 ‘이온 통로’로 변한다. 활짝 열린 통로로 양이온이 통과한다. 그렇다면 이온 1개는 몇 초 만에 통로를 통과할까. 바로 100만분의 1초다. 눈 깜박할 사이(0.1초)에 이온 10만개가 이온 채널 하나를 통과한다. 이렇게 빠르지 않았다면 생명체는 지구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생명현상이 번개처럼 빠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과학자들은 찰나의 현상을 직접 보고 싶어졌다.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김정훈 교수는 “1970년대 독일의 사크만과 네어 박사가 세포막에 붙어 있는 이온 통로 하나만을 떼내 연구하는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노벨상을 받았다.

생명의 찰나를 보게 되면서 응용의 길도 활짝 열렸다. 매운맛수용체, 즉 캅사이신 수용체를 연구하고 있는 서울대 약학과 오우택 교수(통증발현 창의연구단)는 “이온 통로 하나만 떼내 연구하게 되면서 매우 정교하고 순간적인 생명 반응을 알 수 있게 됐다”며 “우리 연구단도 캅사이신 수용체를 마비시켜 통증을 줄이는 신약 물질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찰나의 생명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신약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신약은 우리 몸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는 단백질 등에 달라붙어 병을 고친다. 살아 움직이는 단백질이 찰나의 순간에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면 그런 행동을 조절하는 효과적인 약을 만들 수 있다. 많은 과학자들이 단백질의 움직임을 영화 찍듯 보려고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찰나 속에 신약이 숨어 있다

세포막에 붙어 있는 물 통로. 이온 통로도 비슷하게 생긴 단백질 분자다. 눈 깜박할 새 이온 통로로 10만개의 이온이 통과한다.
이화여대 화학과 남원우 교수(생체모방시스템 창의연구단)는 산소화 효소가 몸 안에서 어떤 식으로 변하는지 연구하고 있다. 산소화 효소는 몸 안에서 유기물에 산소를 붙였다 뗐다 하는 효소다. 에너지를 얻는 반응, 노화의 원인인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반응 등에 쓰인다. 남 교수는 찰나의 순간에 존재하는 산소화 효소의 ‘중간체’를 찾고 있다.

연구팀은 2003년 한 산소화 효소의 3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구조를 모방해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산소화 효소가 유기물에 산소를 붙이는 시간은 가장 짧을 경우 150펨토초다. 이런 일을 하는 효소의 중간체도 눈깜박할 새 만들어졌다 사라진다. 이 때문에 남 교수팀은 영하 40~80℃까지 기온을 낮춰 중간체를 찾는다. 온도가 낮으면 반응이 천천히 일어나 중간체도 오래 생존하기 때문이다. 효소의 중간체를 다 밝혀내면 같은 기능을 하는 인공 효소를 만들 수 있다.

남 교수는 “뇌졸중은 뇌에 산소가 모자라 일어나는데 인공 산소화 효소를 만들어 뇌에 산소를 보충하면 뇌졸중을 치료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거대한 빛공장인 포항방사광가속기도 찰나의 생명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지금의 가속기가 정지된 영상을 찍는 사진관이라면 2010년까지 건설할 계획인 차세대(4세대) 가속기는 움직이는 영상을 찍는 영화 촬영소다. 새로운 가속기는 지금보다 100억배나 강한 빛을 내뿜어 270펨토초에 이르는 찰나를 찍을 수 있다.

유럽분자생물연구소 미셀 코흐 박사는 “단백질은 1조분의 1초 수준인 피코초에서 매우 재미있는 현상을 일으킨다”고 강조했다.(유럽의 차세대 가속기는 100펨토초를 찍을 계획이다). 포항가속기연구소의 유청종 박사도 “차세대 가속기는 살아 있는 단백질이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 영화처럼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과거 생명과학에서는 시작과 끝이 중요했다. 효소(A)와 기질(B)이 만나 결과물(C)을 만들었다면 A, B, C가 중요했지 A가 A1, A2, A3로 변하는 찰나적의 반응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생명의 비밀은 바로 그 찰나에 숨어 있다. 에이즈, 사스처럼 아직 뚜렷한 치료제가 없는 질병도 바로 찰나의 생명 현상 속에 답이 있을지 모른다.

빛과 전기를 움켜쥐다

포항방사광가속기. 차세대 가속기는 단백질의 움직임을 영화 찍듯 보려고 한다.
130억년전 우주의 빅뱅과 함께 빛과 전하, 즉 전기가 탄생했다. 1초에 30만km를 움직이는, 우주에서 가장 빠른 존재였다. 38억년전 지구에 생명체가 처음 탄생하고 그들은 험난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주에서 가장 빠른 것들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빛은 광합성의 에너지원이 되고, 전기는 생명체를 움직이는 수단이 됐다. 포항공대 물리학과 김승환 교수는 “생명체가 가장 빠른 정보처리를 위해 신경을 만들고, 신경의 도구로 전기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속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생존경쟁이 심해질수록 생명체는 빛과 전기의 찰나를 끊임없이 모방하고 이용하려 할 것이다. 광통신과 반도체는 38억년 동안 계속된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서 가장 최근의 한 자락일 뿐이다. ‘일렉트릭 유니버스’를 쓴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말을 조금 빌리면, 우리는 ‘빛과 전기’가 다스리는 찰나 같은 세상의 한 부분이고, 진화는 찰나를 쫓는 무한 경쟁이다.

토초 레이저 |
레이저는 같은 성질(위상)을 가진 단일화된 빛이다. 레이저를 펨토초 간격으로 발사하면 펨토초 동안에 벌어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펨토초는 1000조분의 1초다.

맵다 |
맵다는 감각은 사실 맛이 아니라 통증이다. 즉 고추를 먹으면 통증을 느끼고 이것을 뇌는 매운 맛으로 인식한다. 이 글에서는 일상 용어인 ‘매운 맛’이라는 말을 썼다.

중간체 |
효소, 항체 등이 음식이나 바이러스 등을 만나 반응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중간 물질. 인간이 헐크가 된다면 청바지가 찢어지는 모습이 바로 중간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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