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인간아 > 오히려 아름다운 경지

  아름다운 존재는 만나지 않아도 -아주 멀리, 그러나 분명하게 존재하고만 있어도- 선하고 신실한 가치로 다가옵니다. 말하기 이전에 들리는 부드러운 사랑의 속삭임처럼, 드문드문 떨림과 은밀한 보드라움으로만 전달되는 사무치는 행복처럼, 눈으로 악보를 읽어나가지만 음악은 이미 심장의 박동과 달콤하게 리듬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멀리서, 때로는 멀리서 그리는 것이 미쁘고 종요로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네요. 흐벅지고 살갑고도 푼더분한 로드무비님의 사람 냄새는 순식간에 지나치는 바쁜 시간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땅바닥의 그림자를 돌아보는 것처럼 제 자신을 뉘우치게 하고 연민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로드무비님의 맛난 글들을 읽을 때마다 자꾸만 어떠한 형용사를 덧대고 싶어집니다. 형용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냥 느끼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불구같이! 살아가는 나름의 척박함과 혼자만 알 수 있는 물 밑의 사정은 까무룩 잊고, 잃어버리게 되고 어찌어찌 어둠을 짚어나가는 눈 어두운 장님의 손끝마냥 저 아름답고 순박한 형상을 내 깜냥으로 되살리고 싶은 욕심 탓입니다. 말하는 건 쉬워도 살아가면서 몸으로 부대껴 얻어낸 걸 겸손하게 고백하는 건 힘들고 버거운 것이기에 그냥저냥 말하기는 또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회가 아니면 또 함부로 말하기도 어렵네요. 그렇다고 해도 나뭇잎에 새겨지는 온전한 세계의 무늬를 생각하면, 엽서라고 가벼이 여길 수도 없네요.

 

  존경은 아니어도 존중할 수 있는, 경배는 아니어도 믿음은 가질 수 있는, 혈맹은 아니어도 따스한 온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에서 외로운 사람들은 때때로 만나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공간에서 하나하나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결국 사람 사는 공간의 깊이와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낯설고도 기이한 인연들을 생각할 때마다 자꾸 내 몸에 새겨지는 기묘한 무늬의 주름들을 쳐다봅니다. 가까이서 우러르게 되는 주름들의 형상이 없었더라면 이미 제 몸은 외부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찟어발겨졌을 겁니다. 제게, 자세히 봐야만 아름다운 무늬를 선물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어준 사람이 없어도 찾아내어 받은 사람은 있으니 저 혼자 고즈넉하기도 합니다.


  아침 여섯 시에 잠들어 열두 시가 넘어 일어나는 창백한 흡혈의 시간을 보낸 지도 꽤나 되는군요. 제 시간은 오로지 밤에만 흐르고 있습니다. 오로지 제 자신을 위해 탕진하는 시간이야말로 제가 살아 있는 시간이네요. 요즘 저는 책을 잘 읽지 않고 있습니다. 드문드문 제가 바쁘고 성급하게 읽어나간 책들을 다시금 읽어보고 있습니다. 새삼 알았다고 여겼던 것에서 다시 배우니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보면 제 기억이란 망각의 바다에 떠있는 아주 조그마한 빙산의 좁은 부분일 뿐입니다. 기억하려고 노력해야만 얻어지는 가치들을 위해서 좀 더 노력해야겠어요. 기억하는 행위야말로 사랑에 대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았던 시간들과 만나왔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억하렵니다.


  요즈음 저는 영화 보는 재미와 음악을 듣는 쾌락에 담겨 있습니다. 새로이 모국어를 배우는 것처럼 낯선 언어들을 알아가는 더듬거림이 제게는 아가의 옹알이처럼 기쁘고 즐겁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밤의 시간은 정말 빨리도 흘러가버리곤 해서 쾌락으로 늘상 새벽을 하얗게 표백해버리고 있습니다. 별로 놀지도 못했는데 늘상 날은 서둘러 밝아버리고 버스가 지나는 소리가 들리고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첫사랑의 기억처럼 촉촉한 치맛자락을 끌고 사라져 버립니다. 사람의 앞일을 기약할 수는 없지만 기억하고 마음에 담고 있을 수는 있으니 로드무비님과의 만남을 내내 ‘어떠한 의미’로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가장 비인간적일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고, 저는 인간이니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극단을 확장하고 인간의 영역을 좀더 분탕질쳐보려 합니다. 극단이 오히려 아름다운, 인간을 벗어나려는 몸부림과 지랄이 도리어 아름다운, 인간의 몸을 벗고 자꾸만 인간이 되려는 몸짓이 도저한 아름다움인 경지를 찾아보겠습니다. 이탁오 평전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 하나를 옮깁니다. 제 심난하고 조잡한 글을 반성하는 회개의 의미입니다.



  이지는 말했다.

  “세상에서 정말로 문장을 잘 짓는 사람은 모두 처음부터 문장을 짓는 것에 뜻이 있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 형용하지 못할 수많은 괴이한 일이 있고, 그의 목구멍 사이에 토해내고 싶지만 감히 토해내지 못하는 수많은 것이 있으며, 그의 입에 또한 때때로 말하고 싶지만 알릴 수 없는 수많은 것이 있어, 이것이 오랫동안 쌓이고 쌓여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형세가 되는 것이다. 일단 어떤 정경을 보고 감정이 일고 어떤 사물이 눈에 들어와 느낌이 생기면, 남의 술잔을 빼앗아 자기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에 뿌려 씻어내고 마음속의 불공평함을 호소하여 기이한 것을 찾는 사람을 천년만년 감동시킨다. 그의 글은 옥을 뿜고 구슬을 내뱉는 듯하고, 은하수가 빛을 발하면서 맴돌아 하늘에 찬란한 무늬를 만드는 듯하다. 마침내 스스로도 대단하게 여겨서 발광하여 크게 소리치며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니, 멈추려야 멈출 수가 없다. 차라리 이를 보거나 듣는 사람들이 격분하여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글을 쓴 사람을 죽이고 싶어하게 할지언정, 차마 끝내 명산에 감추거나 물이나 불 속에 던져 사장시킬 수는 없다.”

 

 

  *


  이 그림은 케테 콜비츠의 <죽음의 부름>이라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그림이 도리어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손에 위로를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죽음의 손길에 부드럽게 몸을 기울이고 얼굴을 맡기는 퀭한 표정의 인간을 보노라면 이상하게도 희망이라는 걸 생각해내게 됩니다. 핏줄이 도드라진 손이 죽음의 손인지 알 수 없고, 아니면 인간 형상의 죽음에게 누군가가 손을 내미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저 손의 정체는 죽음으로 보는 게 옳겠지요. 죽음에게 힘을 얻고 죽음으로 인해 삶을 견디는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는 모순에 대해 한류와 난류가 뒤엉키는 혼돈에 가장 많은 물고기떼들이 살 수 있다는 걸 또한 떠올립니다. 경계가 흐릿해지는 극치,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경계를 찾아보겠습니다. 찾으면 다시금 처음인 듯 연락드리겠습니다. 무지개는 원래 '물의 문'이라는 의미가 변형된 것이라 하더군요. 동그란 물의 문을 열고 다른 세상에 들어갑니다. 로드무비님도 부디 꿈꾸시는 무지개 찾으시고, '물의 문' 열고 행복과 사랑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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