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부당하지 않은 관찰자인 나에게 우리 사회는 배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유독 조승수 민주노동당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배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4년 전인가, 노동사회연구소 주최 토론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토론자 중 한 사람은 오늘 노사정위원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노동부 장관이다. 또 어느날 시민단체 ‘학벌없는 사회’가 주최한 토론장에서 만났던, 지금은 대통령이 된 어느 후보를 기억한다. 노동 현안이든, 학벌 문제든, 당시 토론자들이 오늘 철저히 배반당하고 있다는 점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과 김진표 교육 부총리라는 증인이 말해주고 있다.

억압의 시대엔 투쟁이 있었고 투쟁은 희망의 근거였다. 억압이 사라진 시대라지만 소외계층엔 희망이 없다.

이것이 배반 시대의 첫째 특징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배반이 능력 있는 자들의 특권이라는 점이다. 배반은 이 시대 능력의 증거다. 반면에, 이 사회를 영리하게 살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애당초 배반의 가능성이 없다. 능력 없는 사람은 배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한때 훼절과 변절이 더할 나위 없는 수치로 여겨졌고 사회적 비난을 피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오랜 우여곡절의 역사는 대의와 명분이 현실적 안위와 영달에 비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증언한 수많은 변절자들을 생산해냈다. 언젠가 그들도 스스로 후회할 날이 오리라 믿었던 어리숙한 민중들은 배반을 거듭하면서도 승승장구하는 능력 있는 사람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아야 했다. 그들이 후회하는 날은 끝내 오지 않았고, 올곧은 선비를 흠모하던 사람들은 점차 배반을 통한 출세도 능력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능력이 곧 출세가 되고, 출세는 모든 흠결의 면죄부가 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배반에 대한 응징은 우두머리에 대한 충성을 조직의 생명으로 여기는 조폭 세계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조폭 영화가 환영받는 이유는 의리라는 이름으로 배반이 금지된 유일한 조직이라는 점 때문일지 모른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주목받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은 가상세계다.

이 시대의 배반의 구도는 단순하다.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부정하는 모습을 텔레비전과 각종 매체에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그것이 결단에 찬 부정이며 훗날 역사가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주장하면 된다. 실상, 그들은 ‘민중의 바다’를 읊조리며 용이 되는 데 성공했는데, 스스로 용이 되자 ‘민중의 바다’는 다시 개천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승천을 가능하게 했던 푸른 희망으로서의 ‘민중의 바다’는 언제나 ‘개천’이었을 뿐이다. 그들을 희망으로 알고 열심히 풀무질해댔던 개천 사람들은 더는 ‘민중의 바다’가 아니라, 허접한 개천에 사는 비정규직이며 소외계층일 뿐이다.

자신을 배반한 그들에게 개천의 삶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일은 이미 무의미하다. 강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약자 처지가 되었을 경우를 가정하지 않는다. 반면, 사회적 약자들은 강자의 처지가 되었을 경우를 가정하며 그들의 배반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으로.

따라서 이른바 민주화된 시대에 유행하는 정치 공학이란 민중을 배반해온 세력과, 과거에 ‘민중의 바다’를 말했던 자신을 배반한 세력간 싸움의 반영이다. 민중이 배제된 이 지루한 싸움판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그 열쇠는 배반을 응징할 줄 아는 ‘늠름한 민중’에게 있을 것이다.

홍세화/기획위원 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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