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쇼의 정치', '삶의 정치'

최근 강준만 전북대 교수, 조기숙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 윤평중 한신대 교수 등이 '지식인의 현실정치 참여'를 주제로 공개 논쟁을 벌였다. 다만, 강 교수의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반박글을 발표했던 조 수석이 윤 교수의 재반박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논쟁은 더 이상의 동력을 상실한 듯하다.
  
  지금까지 진행된 논쟁의 초점은 정치학자 출신인 조 수석의 '변절' 여부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지식인의 역할', 또는 '현실정치와 지식인의 상관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 수석의 행보만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 자체가 이 정권의 출범과 그 이후의 활동에 환호하거나 최소한 지지했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오늘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보인다.
  
  <프레시안>은 이런 화두와 관련해 칼럼리스트 김규항 씨(어린이 잡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에게 글을 부탁했다. 김규항 씨의 글은 앞선 세 사람의 글과는 맥락을 달리하지만 2005년 한국사회의 현실을 전제로 우리 모두에게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비수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앞으로도 이 논쟁이 보다 풍부하고 현실정합성을 갖는 형태로 진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지식인이란 적어도 자기 세계관에 따라 발언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제도정치에 뛰어든 지식인들은 으레 자기가 속한 '정치적 형편'에 따라 제 세계관을 재조정하곤 한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는 따위 변명은 그나마 낫다. 김대환 씨처럼 방귀 뀐 놈이 성내는 식으로 날뛰거나 유시민 씨처럼 "세상은 다 그런 거야"하며 느물거리는 꼴을 보면 도리 없이 환멸감이 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들은 정치판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세상을 알게 되었다는 걸.
  
  기자와의 한담이 빌미가 되어 이 글을 쓰고 있지만 행여 강준만, 조기숙, 윤평중 씨들이 연루된 논의에 끼어들려는 건 아니다. 개인적인 이유로 당분간 시사 현안에는 관심을 접고 있기도 하거니와, 나는 조기숙이라는 분에 대해 학자로든 청와대 직원으로든 아는 게 없다. 이 글은 강준만 선생에게 쓰는 글이다. 강준만 선생이 조기숙 씨에게 쓴 글을 읽고 나는 진작부터 강 선생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로 했다.
  
  내가 하려는 말은 언젠가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지식인과 현실 참여'라는 매우 고전적인 주제와 관련한 것이다. 대체 이런 세상에서 지식인이 뭘 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지식인을 통털어도 특별한 능력과 열정을 가진 지식인이라 할 강 선생은 대체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이다.
  
  몇 해 전 나는 홍세화, 진중권 씨와 함께 강 선생의 '<조선일보> 반대운동'에 연대했었다. 굳이 말하자면 <조선일보> 반대운동은 좌파적 운동은 아니었다.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조선일보>에 대한 계급적인 접근이라기보다는 윤리적 접근에 가까웠다. 최상층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선일보를 중간 이하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신문으로 만들자든가 하는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세 사람이 거리낌 없이 그 운동에 연대한 이유는 <조선일보>라는 '사회적 암'을 '발견하여' 골리앗에 맞선 다윗처럼 고군분투하는 강 선생을 존경했기 때문이고, 좌파 진영(특히 강단 좌파들)이 <조선일보>에 보이는 모호한 태도를 앞장서서 성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사람은 <조선일보> 문제가 "좌파고 우파고 떠난 문제"라는 강 선생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랐다.
  
  그 운동이 대중적으로 어지간히 확산되었을 때 세 사람은 다시 본연의 좌파적 행보에 좀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운동은 폭발을 거듭하며 대대적인 사회개혁 운동으로 발전했고 결국 정권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정권은 이제 임기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 자 이제 한번 살펴보자. 그래서 세상은 변했는가? 언론이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고 했고 정치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고 했는데 세상은 정말 변했는가?
  
  그렇다면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참혹은 무엇인가?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빈곤층을 비롯한 빈곤의 확대, 가장 충성스러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시장 개방과 공공영역의 사유화, 이어지는 민중의 삶의 파탄, 제국주의 침략 전쟁 동조와 평택 미군기지를 비롯한 반민중적인 국방 외교 정책…. 끝없이 나열되는 이 참혹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이제 개혁의 가장 중요한 기획자였고 여전히 그러한 강 선생에게 이 참혹에 대해 묻고 싶다. 나는 그에게 여전히 이 참혹이 '개혁의 후퇴'에서 일어났다고 보는지, 혹은 이 참혹이야말로 개혁의 정체라고 보는지, 개혁이란 "사회문화적 표피를 변화시키지만 경제 질서와 계급 관계라는 본질은 끝없이 후퇴시킨다"는 내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덧붙이자면, 나는 강 선생이 왜 오늘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따위 보수 정당들을 주요한 출연자로 하는 기만적인 쇼에 왜 그리 적극적인지 묻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조차 "이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정책이나 이념에서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고백하는 판에 왜 강 선생이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차이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한낱 청와대 직원이 된 지식인의 행보에 왜 그리 관심을 갖는지 묻고 싶다.
  
  나는 매우 성실한 미디어 학자인 그가 이 쇼가 갖는 진정한 의미를 모를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보수 정당 간의 존재하지도 않는 차이를 부각하고 사소하기 짝이 없는 에피소드들을 끝없이 만들어냄으로써 대중들로 하여금 마치 그런 문제들이 세상의 실체이거나 정치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대중들로 하여금 정작 자신들의 문제인 오늘의 참혹은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여기게 만드는 쇼의 의미를 말이다.
  
  나는 알 수 없다. 대중들을 미궁에 빠트리는 <조선일보> 문제에 대해 그토록 열정적이던 강 선생이 왜 오늘은 대중들을 미궁에 빠트리는 그 쇼에 없는 역할까지 만들어가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오랜 휴식 없는 싸움에 지친 걸까? 강 선생이 그 기만적인 쇼의 정치에서 삶의 정치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나는 강 선생이 오늘 우리 눈앞에 펼쳐진 참혹을 "좌파고 우파고 떠난 문제"로 여기고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최초의 우파 지식인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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