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수학, 히파티아

[김재희의 여인열전]

▣ 김재희/ <이프> 기획위원 franzis@hanmail.net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른 흉노족이 다뉴브 강가에 닿고, 게르만족은 좀더 살 만한 남쪽으로 민족의 대이동을 시작하던 4세기 말,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로마제국은 ‘예수는 인간보다는 훨씬 더 신에 가깝다’는 니케아회의의 결정을 팍팍 밀며 ‘못 믿는 자’들을 엄단했다.

이 무렵 국제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적인 첨단 학문의 집결지일 뿐 아니라 대립하는 종교들의 본거지여서 ‘종교간의 갈등’으로 스산했다. 유대인과 비기독교신자들은 힘 좀 쓰는 교회 권력자들의 손에 의해 추방되고 배척당하는 일이 잦았으나, 헬레니즘의 본산지인 만큼 철학과 자연과학의 전통으로 성령의 불길에 저항하는 지식인 또한 적지 않았다. 이들 중에 수학자 테온은 유난히도 영특한 딸 히파티아를 무릎에 앉히고는 예술과 문학, 자연과학과 철학에 눈을 뜨게 하고 여러 나라에서 온 지식인들과 교류를 통해 지적 소양을 쌓게 했다. 또한 다양한 종교의 교리를 빠짐없이 가르치고 그에 대한 ‘분별력’까지 북돋아 어떤 신앙도 딸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히파티아는 아테네에 가서 플루타르크와 그의 딸이 운영하는 신플라톤 학파 계열의 학교에 유학하고 돌아온 뒤 처음에는 귀족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비밀과외’를 하며 냉철한 사유법을 가르쳤다. 또한 아버지와 함께 ‘원추곡선의 계산법’을 추가시킨 유클리드 기하학의 개정판을 냈는데,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와 뉴턴 등이 새로운 과학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녀의 교본은 1천년이 넘는 세월 내내 ‘수학의 정석’ 자리를 굳건히 지킨 셈이다.

수학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아버지를 능가하는 명성을 얻게 된 히파티아 선생님은 하얀 무명의 망토 차림으로 여러 학교에 출강하며 시내를 활보했는데, 절세미인이던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유학 온 학생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고, 숱한 왕자와 철학자로부터 구혼을 받았으나 “나는 진리와 결혼했노라”는 깜찍한 화법으로 모두 물리치며, 물질세계를 벗어난 인간 본성의 신적 요소, 즉 영혼을 찾으라고 이 불쌍한 영혼들을 다독였다. 영혼은 “우리 내부의 진실한 눈”이니, 이를 통해 미모무상도 깨우치고 대신 모든 존재의 궁극적 원인인 ‘철학적 신’에 이르기를 독려했으니, 기독교도들의 ‘아버지 하느님’은 좀 무안했겠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 하느님’의 제단에 바칠 ‘처녀 제물’로 낙인찍히고 415년 어느 날, 주교였던 키릴로스의 앙숙인 남자와 친하게 지낸 일이 화근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출강을 나가던 그녀의 마차에 달려든 기독교 광신도들은 히파티아를 낚아채 발가벗긴 뒤, 성소로 끌고 가 굴 껍데기로 온몸을 짓이기고 불길에 처넣어버리는 것으로도 부족했던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있던 그녀의 저작은 죄다 꺼내서 분서갱유를 하고, 다양한 소문을 퍼뜨리며 ‘완전범죄’를 감행한 탓에 최근까지도 ‘여성은 수학을 못 하거나, 하면 못 쓴다’는 편견 혹은 미신이 잔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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