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제 단상

한국 역사에서 지역문제는 두 가지 차원으로 존재해왔다. 하나는 풍습이나 문화의 차원에서, 다른 하나는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심각하게 말하는 지역문제는 물론 뒤의 것이다. 풍습이나 문화의 차원에서 지역문제는 전통시대부터 있어 왔다. 역사 속에서 그 흔적은 꽤 오래 전부터 발견된다. 지역문제가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으로 변한 건 박정희 파시즘부터다. 텔레비전 정치드라마 식으로 묘사한다면 “박정희가 라이벌인 김대중 씨를 꺾기 위해”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 씨의 첫 번째 대선 출마에서 경상도 표가 아주 많았다는 사실은 그 충분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오늘 시점에서 냉정하게 정리해 본다면, 지역문제는 ‘지배세력의 분할지배 전략’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지역문제는 보수정치세력의 주류(박정희-경상도)가 기획하고 비주류(김대중-전라도)가 동의(혹은 결과적 동의)를 하면서 만들어졌다. 인민들이 제 고단한 삶의 원인을 지배세력에게서 찾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민들을 지역으로 쪼개어 서로 적대하게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역문제는 보수정치 세력끼리의 연대(혹은 결과적 연대)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 수익은 시차를 두고 분배되었다.(김대중 씨는 지역문제의 최대 수혜자이기도 하다.)

보수정치 세력의 연대로 만들어진 지역문제를 다시 두 세력을 이어받은 오늘의 두 보수정치 세력(수구보수와 개혁보수)의 연대(혹은 戀情?)으로 해결한다는 건 좀 맹랑한 발상이다. 터무니없는 이간질로 싸움을 붙여 감정의 골을 있는 대로 다 파놓은 놈들이 이제 와서 지들끼리 화해할 테니 다들 얼싸안고 춤을 추라는 꼴이랄까? 인민을 줄에 달린 인형으로, 장기판의 졸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오늘 지역문제 해법을 말하는 사람들은 수십년 전 지역문제를 기획하던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오늘 시점에서 인민들 역시 지역문제의 순전한 피해자는 아니다. 지역문제가 기획되고 진행되던 초기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그 문제의 얼개가 적어도 텔레비전 정치드라마 수준으로는 밝혀진 지 오래인 지금도 여전히 “전라도 놈들은 원래 나쁜 놈들” 따위의 말을 내뱉는 사람들은 지역문제의 선봉대일 뿐이다. 그들의 뒤틀린 의식은 지배세력에게서 주입된 것이었지만 이젠 매우 냉정한 계산에 의해 지속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부산사람들이 정형근에게 몰표를 준 건 ‘전라도 놈들이 잡으면 우리는 망한다’라는 계산 때문인 것이다.

결국 지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그 출발이 지배세력의 지배전략(보수정치 세력의 연대)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예나 지금이나 보수정치 일변도(독재와 민주에서 수구와 개혁으로 바뀐)인 한국의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 중간 이하 계급, 숫자로는 한국인의 대부분인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진보정치(흔히 민노당을 일컫지만 실은 민노당을 포함 아직 제도정치에 편입되지 않은 좀 더 급진적인 정치세력을 아우르는 말이어야 한다.)가 수구와 개혁을 합한 보수정치와 대등한 긴장을 이룰 수 있을 때 지역문제도 비로소 균열이 일어날 것이다.

둘째는 지역문제의 얼개가 드러난 후에 여전히 지속되는, 뒤틀린 이기심에서 나오는 지역적 적대 행위는 정당한 사회적 판단을 받아야 한다. 이를테면 정형근에게 몰표를 준 부산 사람들은 모든 인민들 앞에서 반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에 잘 몰라서 했던 일이라 해도 이제 알게 되었다면 역시 반성해야 한다. 이를테면 수십년 전 군대 시절에 깽깽이(전라도 사람) 졸병을 괴롭혔던 사람은 한번이라도 진지한 참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신은 이미 잊은 일일지 모르지만 피해를 당한 사람의 상처는 저절로 아무는 게 아니다. 지역문제는 그렇게 진보정치의 성장과 ‘전국민적 성찰’이 동시에 진행될 때 비로소 근본적인 균열을 낼 것이다.

덧붙이자면, 풍습이나 문화의 차원에서 지역문제는 세계 어디에나 있다. 우리 사회와 늘 비교의 대상이 되곤 하는 유럽도 없는 나라가 없다. 중요한 건 공정한 사회체제와 인민들의 성숙한 사회의식을 통해 지역문제를 풍습이나 문화적 차원으로 머물게 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의 지역문제도 물론 바람직하고 권장할 일은 아니지만 반드시 해결해야할 사회 문제도 아니다. 이를테면 나는 경상도 남자들의 불퉁거리는 말투가 참 듣기 싫다. 동무와 어느 술집에 들어갔다가 그런 소리가 크게 들리면 조용히 되돌아 나온다. 물론 그건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나의 취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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