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말의 현실은 난폭하고 냉혹하며 잔인했다. 기근과 질병과 전쟁이 곳곳에 만연해 있어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 무력하게 무릎을 꿇는 시기였다. 이때가 페스트로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져 갈 만큼 고통스러운 시기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버텨 나가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환상이었다. 그래서 현실을 기사도적 이상으로 환원시킨 것이다.

기사들은 스스로에게 고난을 부여했다. 이 시기는 그래서 서약의 전성시대가 되었다. 기사들은 온갖 괴상한 서약을 했다. 푸아투 지역의 한 기사단은 고귀한 태생의 남녀 연인들의 모임이었는데, 이들은 여름이면 두꺼운 옷과 털 외투, 모직으로 안을 댄 두건 따위를 입고 벽난로에 불을 떄야 했으며, 반면 겨울에는 털이나 모피로 안을 대지 않은 얇은 옷 하나만을 입어야 했다. 살을 에는 추운 날씨에 바닥에 나뭇잎을 깔고 벽난로는 나뭇가지 밑에 숨긴 채 위에선 얇은 홑이불밖에 덮지 않았다.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은 금욕적인 고행을 통해 사랑의 힘을 증대 시키겠다는 뜻이었으나, 사랑의 힘이 크게 자라기 전에 이 기사단의 여러 사람들이 그만 얼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들은 소원대로 사랑의 순교자가 된 것이다.

어떤 영국인들은 프랑스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까지는 한 눈으로만 보겠다는 맹세를 하고는 한쪽 눈을 헝겊으로 가리고 살았다. 아비뇽에 갇힌 브누아 13세는 풀려나기 전에는 절대로 면도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한 수난 기사단에 입단한 폴란드인은 9년 동안 한 번도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어떤 기사들은 자신이 정한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는 고기를 한입도 먹지 않겠다든지 하루에 빵 세 개만 먹겠다는 식의 맹세를 하기도 했다. 이슬람교도 한 명을 죽이기 전까지는 토요일마다 침대에서 자지 않겠으며, 15일을 계속해서 같은 마을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사람도 있었다.

기사도 ‘놀이’에는 확실히 사랑이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기마 시합은 에로틱한 요소들을 분출하는 좋은 기회였다. 기사들은 자기가 사모하는 부인의 베일이나 옷을 걸치고 나오는 것이 관례였다. 또 여인네들은 시합의 열기가 뜨거워지면 몸에 걸친 장신구들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 그래서 마침내 경기가 끝나면 여인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팔과 어깨마저 소매 없이 맨 살을 드러냈다.

기마 시합은 또 유부녀와 불륜을 벌이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였다. 한 대귀족이 주최하는 기마 시합에서 그 귀족의 부인은 자신을 흠모하는 세 기사에게 자기 속옷을 주면서 갑옷 대신 그 속옷을 입고 싸울 수 있는지를 물었다. 두 기사는 거절하지만, 세 번째 기사는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답한다. 이 기사는 그런 위험한 상태로 나왔다가 심하게 부상당하여 온몸에 상처를 입는다. 그는 죽어 가면서 피투성이가 된 찢어진 속옷을 귀부인에게 돌려주며 폐회식에서 그 옷을 걸치고 있어 달라고 부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