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다

진보의 도그마에도 도전하는 리영희를 ‘원로 찬양’으로 박제해버린 진보 진영…국보법 폐지 등에 생산적 대응은 포기하고 ‘지당하신 원론’만 고집해야 하는가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언젠가 인터넷에서 자신을 좌파로 여기는 한 논객이 우파는 민중을 “피동적, 수동적 존재로 보면서 미리 한계를 정하는” 반면, 좌파는 민중을 “능동적, 적극적 존재로 보고 그들이 역사를 이끌어간다고 보는 입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걸 보고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그 주장의 고색창연(古色蒼然)과 더불어 그런 이분법이 여전히 개혁·진보 진영 일각에서 꽤 먹혀들고 있는 현실 때문이었다.

좌파와 우파의 ‘민중 상업화’

사실을 말하자면 ‘민중 예찬’은 일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조·중·동의 지면에서 더 자주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민중 상업화’다. 우파가 주로 돈벌이 용도로 ‘민중 상업화’를 써먹는다면, 좌파는 주로 헤게모니 투쟁의 용도로 ‘민중 상업화’를 동원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민중 예찬’은 늘 아전인수(我田引水)의 게임이다. 선거나 여론조사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결과가 나오면 ‘민중은 위대’하고,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반대편의 음모’ 때문에 그렇다는 식의 이중잣대가 만연해 있다.

특히 일부 개혁·진보파의 ‘민중 예찬’은 편의주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이른바 ‘박정희 신드롬’이나 ‘이건희 신드롬’을 정직하게, 아니 총체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무지몽매(無知蒙昧)의 비극으로 보면서 그것마저도 수구 언론 탓으로 돌린다. 그러다가도 그 무지몽매한 대중이 선거판에서 뭘 좀 보여주면 헷가닥 ‘민중 예찬론’으로 돌아선다. 두개의 전혀 다른 사건에 대한 상호 연관성은 규명되지 않는다.


△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에도 진보 진영은 원칙에만 집착했다.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여당 의원들의 국회 농성.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민중 예찬론’에 경도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편의 입장을 보여온 희귀한 진보 지식인 중 한명으로 리영희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나는 리영희에 대한 개혁·진보 진영의 상투적인 평가와 예찬에 질려 있다. 그의 과거 투쟁을 높이 평가하면서 “내 사상의 은사”라는 식의 회고담 일변도다. 나는 그런 찬사에서 오히려 ‘리영희의 종언’을 암시하는 오만을 읽는다.

내가 보는 리영희의 장점은 그게 아니다. 리영희가 ‘사회주의의 역사적 패배’를 인정한 1991년 1·26 사건의 의미를 평가하지 않고선 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사회주의의 역사적 패배’라는 주장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때 리영희를 향해 비판을 날렸던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 나의 논점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지적 성실성’이다. 1·26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리영희는 76살의 고령에도 ‘도그마와의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의 사상적 제자들은 리영희를 군사독재 정권의 도그마와 싸운 투사로만 기억하면서 그 기억을 박제해버렸으며, 그가 지금 정반대편의 도그마에 도전하고 있다는 건 외면하고 있지만 말이다.

2005년 3월 리영희는 회고록 <대화> 출간을 계기로 오랜만에 많은 발언을 했다. 그는 열린우리당 강경파의 이분법을 비판했으며,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서도 전혀 그답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의석이 겨우 절반을 넘을까 말까 한데 무리수를 쓸 수가 있나. 시간과 대세를 살펴가면서, 여유 있게 너그럽게 힘을 운영해야지. …이제는 군부독재 때처럼 무리수를 쓰면서 전면 투쟁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시대가 아니란 말이에요.”

리영희는 <대화>에서 ‘민족적 유전자론’까지 제기했다. 그는 한국 현대사를 지배한 분열에 대한 환멸을 이야기하면서 사화·당쟁·분당·족벌 정치 등과 같은 퇴행적 행태의 요소가 ‘민족적 유전자’를 형성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를 품을 때가 있다고 고백한 것이다. ‘민족적 유전자’라는 과격한 용어까지 써가면서 리영희가 말하고자 하는 건 ‘민족적 면책론’에 대한 거부다. 한국의 불행한 현대사에 대해 외부에서 작용하는 의지나 흉계에다가 일괄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리영희는 대담자 임헌영에게 “이제 21세기로 넘어왔으니 우리 민족이 자기만족에 도취되거나 우리 역사가 겪은 실패들을 외세에만 돌리지 말고, 뼈아픈 자기비판을 통해서, 노신이나 프란츠 파농이 그들 동포에게 요구했던 그런 민족적 각성을 통해서,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지혜를 갖게 되기를 바래. 이러한 정신 자세야말로 진정한 겨레 사랑이고 민족적 긍지가 아닐까 싶은데. 어때요, 안 그래요?”라고 동의를 구했다.

<한겨레> 사설들은 비겁했다


△ 리영희씨는 '도그마와의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의 사상적 제자들은 리영희씨를 군사독재 정권의 도그마와 싸운 투사로만 기억하면서 그를 박제해버렸다. (사진/ 한겨레 탁기형 기자)

임헌영은 일부 공감을 표하면서도 “오랜 역사 속에서 결국 나라를 지킨 것은 지도층이 아니라 국민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도층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지만 국민대중이야말로 나라를 염려한 것 같습니다. 민족적 허무주의로 흘러버리면 너무 서글퍼지는데요”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리영희는 “나는 그것이 어떻게 ‘민족허무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안 가는구만”이라고 답하면서 “나라를 판 것은 지도층이나 지배계층이고 나라를 염려하고 지킨 것은 대중이라는 관점도 조금 문제야. 그렇게 단순명료하게 이분법적으로 단정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리영희의 이런 주장들이 다 옳다는 게 아니다. 내가 놀랍게 생각한 건 리영희의 <고백> 출간과 함께 양산된 많은 기사들이 위와 같은 주장은 전혀 거론하지 않으면서 오직 ‘원로에 대한 찬양’에 몰두하는 걸로만 끝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진보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보기에 그건 분명히 마스터베이션이었다. ‘지적 불성실’의 극치였다. 이런 마스터베이션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여러 차례 사설로 촉구한 <한겨레> 지면에서도 나타났다. <한겨레> 사설들은 모두 백번 옳은 말이었지만 좀 비겁했다. 논점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당시 개혁·진보 진영에서 본 사실상의 논점은 ‘물리적 강행론’ 여부였다. 경호권을 발동해 한나라당 의원들을 국회의사당에서 끌어내고 표결을 강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좌절되자 국회에 ‘사망선고’를 내릴 정도로 급변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열린우리당 의원 유시민은 그 이전에 “우리당이 한나라당 의원들을 끌어내면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도 어렵지만, 그럴 경우 탄핵 때 같은 후폭풍을 맞아 정치적 치명상을 입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그 ‘정치적 치명상’을 두고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겨레>는 단 한번도 그 점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할 당위성만을 계속 노래 부르면서 핏대 올리기에만 바빴다. ‘정치적 치명상’을 입더라도 강행해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거나, 아니면 ‘정치적 치명상’을 입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을 내놓을 생각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한겨레>가 진정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열망했다면 리영희를 비롯해 개혁·진보 진영에서 나온 여러 건의 ‘물리적 강행 반대론’에 대한 반론을 제시했어야 옳았다. 그게 바로 개혁·진보 언론이 할 일이었다.

나는 <한겨레>가 그런 적극 대응을 포기하고 ‘지당하신 원론’만 역설했던 건 개혁·진보 진영의 ‘아비투스’(습속)로 자리잡은 마스터베이션 기질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 기질은 원론과 상식에만 투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론과 상식은 반박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늘 승리한다. 그러나 그건 실속 없는 승리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는 원론과 상식만으로 대처하기엔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만드는 ‘상식의 폭력’

상식이 잘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상식을 무기 삼아 싸우는 건 필요한 일이거니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매사에 상식을 전방위적 무기로 사용하면 비극이 발생할 수도 있다. 아무리 상식이 잘 통용되지 않는 사회라도 상식만으론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일들이 있는 법인데, 그것마저 해오던 습관대로 상식의 칼로 단순명쾌하게 재단하려 한다면 그건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러한 ‘상식의 폭력’ 또는 ‘단순명쾌의 폭력’은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이 되고 말았다. ‘상식의 폭력’을 행사하는 쪽과 ‘상식의 폭력’이 다수의 공감을 얻을 수 있게끔 끊임없이 ‘몰상식’을 생산해내는 쪽 중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다고나 할까.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업보치곤 가혹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인권 문제와 관련해 몰상식이 판을 쳤던 사회에선 ‘민주·개혁·진보’는 ‘용기’ 하나만으로 족했다. ‘머리’는 ‘잔머리’로 빠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에 ‘가슴’이 중요한 덕목이었다. 주요 행동강령이 저항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할 필요도 없었고, 공부도 오직 저항의 방법론이면 족했다.

87년 6월항쟁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시절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민주·개혁·진보’도 공부해야 하고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쪽으로의 진화가 이뤄지는 듯했지만,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대중주의는 그 흐름을 역류시키고 말았다.

국가적 차원의 상식이 위협받는 비상 상황에서 인터넷의 상식 수호 능력이 위대했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비상 상황에서의 위대성을 면죄부로 삼아 평상시에 인터넷의 그늘을 외면해도 괜찮은 걸까?


△ 인터넷의 대중주의는 비상 상황에서 위력을 발휘하지만 '상식의폭력'을 양산한다. 탄핵반대 시위. (사진/ 류우종 기자)

인터넷은 디지털식 양자택일을 선호한다. 인터넷의 ‘과잉·편중 참여’와 ‘속도의 경제’는 중간적 입장을 배제한다. 인터넷은 상식으로 무장한 수많은 신진 투사들을 양산해냈으며, 이들은 ‘상식의 폭력’을 대량생산했다. 인터넷에 참여하는 가공할 머리 수에 집착하는 신진 기업가들은 온갖 언어의 성찬으로 인터넷 찬가를 불러댔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자본의 인터넷 장악과 보수파의 인터넷 적응이 가속화되면서 인터넷의 색깔 판도가 크게 바뀌고 있음에도 신진 기업가들은 인터넷 찬가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

노무현 정권이 헤매는 이유도 ‘상식의 폭력’과 무관하지 않다. 노 정권은 원론과 상식에만 투철할 뿐 그 다음이 없거나 약하다. 최소한의 원론과 상식마저 유린당했던 과거 역사를 생각해보면 원론과 상식에 투철한 건 미덕이지만, 문제는 ‘원론·상식파’가 이젠 저항세력이 아니라 국정운영을 책임진 세력이 되었다는 데 있다.

과거 저항의 상대는 군사독재 정권과 수구세력이었다. 비극은 지금도 상대를 오직 그들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론이 더 무서운 상대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여론 악화는 무조건 수구 언론 탓으로 돌려진다. 여론을 고려한 대안을 더러운 타협이나 굴복으로 여기는 정서도 팽배해 있다. 지난해 대통령 탄핵 사태와 4·15 총선 때 쏟아진 ‘민중 예찬론’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개혁·진보’가 집단 정체성을 확인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만끽하는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라면, 개혁·진보 진영 내부의 생산적인 논쟁과 토론을 금기시하는 지금의 풍토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간 나온 논쟁과 토론은 모두 ‘선명한 저항’ 또는 내부 헤게모니 투쟁과 관련된 것이었다. 원론·상식과 각론·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괴리는 아예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걸 섣불리 건드리려고 했다간 원론·상식파의 매를 맞기 십상이다. 내부의 문제는 스스로 곪아서 터질 때까지 내버려둔다는 게 사실상 철칙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개혁·진보파는 언제까지 이런 ‘스스로 곪아터지기’ 게임을 방치할 셈인가? 자신의 신념에만 몰두하는 것에서 삶의 기쁨과 보람을 찾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자. ‘대한민국 경영’을 꿈꾸며 여론을 이끌어가기 위해 애쓰는 싱크탱크들이 크게 늘었다. 이들 중 개혁·진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곳이 단 하나라도 있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인터넷에 열혈 투사 중심으로 차려진 ‘중구난방 싱크탱크’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지금 수백만 인구가 재벌 경제연구소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안달하는 형국이다. 이건 두렵게 생각해야 할 사실이다. 모든 ‘실질’은 넘겨주고 ‘명분’으로 마스터베이션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개혁·진보의 싱크탱크는 있는가

개혁·진보의 싱크탱크가 없으니 <한겨레>에게라도 물어보자. 개혁·진보 진영 내부의 문제가 조·중·동의 과장·왜곡 보도로 고발되기 이전에 <한겨레>가 스스로 문제를 미리 찾아내 대응하는 ‘포지티브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건 불가능한가? 개혁·진보의 원론·상식에서 이탈했을 때에 한해서만 노 정권을 비판하는 소극적인 자세가 언론의 본분이라고 보는 건가? 이젠 자신을 저항자로 낮추는 과도한 겸손에서 벗어나 주도자로서 책임감을 갖고 세상을 요리해보겠다는 건방을 떨어볼 때도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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