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늘빵 > 민주주의와 한국의 노동(2)(최장집)

국가-재벌관계 역전과 완강한 보수화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하에서 국가-재벌관계는 근본적으로 변했다. 혹자는 민주화의 효과와 시장 투명성의 원리에 힘입어 국가/정치-재벌 간의 정경유착이 현저하게 약화되면서 정치부패가 감소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양자간 힘의 관계의 구조적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과거 권위주의시기 국가-재벌관계는 어디까지나 국가주도의 주종관계였다. 그러나 이 양자간 관계는 역전된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대통령은 5월 17일 중소기업 관련 대책회의에서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라고 말했다. 힘의 관계는 분명 역전된 것으로 보이고, 그것은 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민주화이후 한국사회의 가장 특징적인 변화는, 시장지상주의, 이를 구성하는 시장자율성 또는 시장주권, 경쟁, 업적주의, 효율성의 가치가 사회 전체의 전일적 가치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장지상주의의 가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러한 시장가치는 투명성, 법의 지배, 국가의 실패, 국가 및 정치의 부패 등과 같은 부수적 가치와 규범, 상징과 인식들을 수반한다.


그것이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것은, 실제로 시장이 그러한 내용적 특성들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 하는 것과 무관하게 그러한 가치들이 외재적 강제의 개입 없이도 자율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효과를 갖는다.


① 시장지상주의의 가치는, 가치다원주의를 허용하지 않는 단일가치이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는 이를 잘 수행하는 결과에 따라 서열화로 자리매김 되기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힘의 관계는 기업이 되고, 대기업이 되고, 5대 재벌기업이 되고, 최대 재벌기업이 되며, 그들 기업의 오너 또는 CEO가 된다.


지난 날 냉전시기에서나, 권위주의적 산업화시기에서도 그러했듯이 헤게모니적인 가치가 확립된 연후에는 다른 경쟁적인 가치들은 불온시 되고 억압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반기업정서, 반시장주의 등이 그러한 담론이다.성장주의와 시장지상주의는 동전의 양면의 짝을 이루며, 그 중심에 재벌-국가의 동맹이 위치한다. 그리고 그것이 헤게모니가 되는 것만큼 재벌이 중심이 되고 하위파트너로서 국가의 정책이 그에 봉사하는 내용이 된다.


그것은 국가-재벌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의 역할과 성격 자체를 변모시킨다. 즉 모델이 되는 재벌기업이 국가의 역할과 기능, 그리고 그 행위의 범위가 무엇인가를 정의해 주고, 국가가 해야 할 정책을 제공해 주며, 관료행정의 규칙과 규범의 모델을 제공해줌으로써 국가 그 자체를 내부로부터 변모시키는 것이다.


② 시장과 시민사회를 포함하여 사회에 대한 국가의 중심적 역할이 급격하게 약화됨과 동시에, 시민사회와 시장에서의 거대기업의 역할을 확대함으로써 한국도 이제 기업사회적 면모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와 동시에, 대학, 언론사, 교회 등과 같이 비경제 영역에서의 조직들의 자율성이 급격하게 증대되었다. 그리고 시장의 기업조직과 사적 영역에서의 이들 자율적인 거대조직들의 연계가 또한 급격하게 확대, 강화되었다. 이는 한국사회의 보수적 질서와 헤게모니의 강화를 의미한다. 그럼으로 반대편에서 그것은 민중적 힘의 약화를 수반한다.민주화이후 계속되어야 할 민주화는 위로부터 아래로 파급되는 과정을 거쳤어야 했다. 민주정부의 선출을 중심으로 국가부문의 민주화가 선행하고, 다음에는 민주정부에 의한 개혁적인 정책들을 통하여 사회를 구성하는 하위단위, 시장의 규칙을 민주적으로 개혁하는 방법으로 민주적 가치와 규범, 규칙들은 전사회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그러나 민주화가 최소정의적 민주주의의 의미가 말하듯,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하는 수준에서 정지될 때, 국가의 약화에 힘입어 사회의 헤게모니 구조는 이전보다 더 완강한 보수적 질서로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민주정부하에서 노동의 위상


민주주의하에서 노동의 위상은 “노동 때리기”라는 말로서 잘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 이전의 “정치(인) 때리기”, “386 때리기”를 대체한 느낌이다. 오늘날 노동, 특히 노동운동은 부도덕이나 또는 폭력의 상징처럼 언론을 통해 묘사되고 일반에게 인식된다. 성장정책의 걸림돌, 시장효율성의 장애요인으로 인식된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과시하며 세계적 브랜드로서 한국의 국력과 위상을 드러내는 자랑스런 이미지의 반대편에는 어두운 그늘에서 국가의 위상과 더불어 이들의 발목을 잡는 하찮은 무리처럼 인지되는 것이 오늘의 노동의 이미지처럼 보인다.노사관계에서 노동이 정당한 파트너로 인정되지 못하는 것은, 권위주의시절에서나 오늘의 민주정부하에서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것 이상이다. 정치수준과 노사관계수준에서 모두 노동운동에 대한 권위주의적인 억압장치들이 제거된 민주적 환경하에서 노동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즉 노동부문에서 절차적 수준에서의 민주화는 이루었으나, 노동을 포괄하는 보편적 시민권의 확대를 통하여 실질적 수준에서의 민주화를 수반하지 못한 것이다.기업이 노동에 대해 부정적,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개혁적인 것으로 상정되었던 민주정부의 태도이며 정책인 것이다.


우리는 현재, 민주정부의 지도자들이나, 노동행정 및 정책결정자들이 기업계의 완강한 보수적 견해와 다를 바 없는 태도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민주정부-재벌기업 동맹의 환경하에서 노동운동이 자리잡을 여지는 매우 좁다.지난 시기, 노동에 대한 보수적 견해를 표현하는 담론으로 “노-노 대결”이라는 말이 있었다.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노동운동이 노동의 이익을 대표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방기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면서, 그들이 특히 노조간부들일 경우 노동운동 내 헤게모니 싸움에 몰두하고 노동귀족이 되어, 도덕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 스스로 만든 것이지, 기업이나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의 민주정부 집권세력 혹은 주요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태도와 인식은, 정부 밖의 과거 노-노 대결 담론의 연장선상에 머물러 있다.


“비정규직 법안”을 둘러싼 쟁점에 관하여


신자유주의하에서 노동운동의 틀은 1998년 2월, IMF개혁패키지를 수용한 민주정부의 노동시장유연화가 그것이다. 노사정위원회에서의 “2.6협약”은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의 허용을 핵심으로 한다. 일종의 공급측면 코포라티즘의 내용을 갖는 것이다. 그동안 권위주의시기 이래 노동운동이 이루어낸 전체성과 혹은 민주주의라면 당연히 부여해야 할 노동자들의 조직권의 확대를 인정받는 것과 노동시장유연성을 교환해야하는 협약의 틀 자체가 불균등한 것이었다.


이 불균등협약은 이후 대량해고와 비정규직의 급증으로 나타났듯이 노동의 기본적인 권익의 상실을 결과함으로써 노동운동 진영에게는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하게 되어, 협상테이블의 참여하여 문제를 개선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인 두려움을 갖게 만들었다.노동운동측의 입장에서 이 딜레마는 최근의 “비정규직법안”을 둘러싼 갈등을 통해 되풀이되었다. 정부는 이슈의 내용을 정의하는 것에서 협상의 범위와 의제를 협상의 대상으로 개방하기보다, 먼저 그러한 것들을 결정한 뒤 노조의 참여를 요구했다.


예컨대 비정규직의 증가추세를 제어하는 접근이라기보다 비정규직화의 경향을 수용하고 그 위에서 비정규직의 존재조건을 합리화하자는 협상의 틀을 결정하여 제시한 것이다. 그것이 비정규직의 처우를 얼마나 개선하는 것인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요컨대 핵심은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유연화의 방향을 완결짓고자 하는 정책목표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정부의 정책의도가 사전에 결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협상에 참여하여 노조가 얻을 것은 다만 부분적인 교환 이상일 수 없었다.


노조는, 참여하여 작은 것이라도 얻느냐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폭력적, 급진적, 파괴적 집단이 아니라 민주주의 하에서 이성적 협상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어떤 이미지개선의 효과를 얻느냐, 아니면 협상의제 자체를 보다 중요한 것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현재의 얻을 것을 포기하고 판을 깨느냐 하는 선택의 딜레마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노조의 폭력사태는 노동운동 전체의 도덕적 위기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노조의 문제일까?


노동운동의 위기는 민주정부, 민주주의의 위기


노동운동의 위기에 앞서 민주정부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측면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말은 노동운동이 위기를 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근원이 정부의 노동정책, 사회정책, 경제정책에 있으며, 민주정부가 민주주의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 무능과 잘못된 정책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민주정부의 지도자, 노동문제의 정책결정자들은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업에 이윤율을 보장해줄 수 있는 노동시장유연화를 확대하고, 그것이 고용효과를 증대함으로 사회전체에 보다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확신하는 듯하다.


그 확신이 매우 강한 나머지, 현 정부의 노동정책은 마치 70년대 말 80년대 초 영국의 대처정부를 연상시키는 과격함을 갖는다. 그러나 영국의 노조조합원들이 한국의 노조원들과 비교할 때,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사회보장 및 복지혜택을 향유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오늘의 민주정부의 노동정책이 얼마나 반노동적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노동시장유연화와 성장 및 고용효과 간의 상관관계에 관하여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한 테크닉을 보여줄 능력은 없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경제지표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부의 노동정책이 근거를 가질 수 있는 논거 또는 그 정당성을 입증할 수 없다.


경제성장지표는 금융위기이후 1999년 이후 짧은 회복세를 보인 이래 침체, 호황, 불황을 되풀이하는 가운데서 안정적인 성장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해 4.6%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2005년 초반에도 이렇다할 상승세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통계를 보면, 금년 1/4분기의 성장의 내수기여도가 다소 상승했다 하더라도 2.7%의 성장률에 그쳤다(한겨레, 5.21).


김유선박사의 연구결과를 따르면, 한국의 노동시장유연화는 금융위기 이후 미국보다 더 높은,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수준으로 과격하게 진행되었다(김유선, 한국노동자의 임금실태와 임금정책, pp.121-127). 세계 최고 수준의 노동시장유연화에도 불구하고 청년실업, 고용불안, 불안정한 취업 및 실업은 호전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소수 선도적 업종에서의 재벌대기업의 성장이 눈부시고, 대기업이 사상최대의 호황을 구가하며, 수출이 사상최대의 실적을 자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또한 노동소득분배율과 부가가치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금융위기 이전인 1996-97년과 2000-2003년 사이를 비교할 때 현저하게 낮다. 노동시장유연화가 급진적으로 진행된 오늘의 상황에서 그것이 고용의 증대와 더불어 우리경제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했다는 아무런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앞 장에서도 보았지만, 한국에서 고용을 흡수하는 것은 2001년 기준으로 86%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으로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부문이다. 이는 왜 고용에 있어서 산업구조의 역할이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그리고 저소득층의 구매력 증대가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두 부문의 상황은 절대적으로 약해지고 나빠졌다.


노동시장유연화 확대 주장, 실증적으로도 설득력 없어


노동시장유연화의 확대를 주창하는 정부의 노동정책결정자들은 항변할런지 모른다. 노동시장유연화가 낮을 경우, 해외로부터의 투자유인을 감소시키고, 국내기업의 해외투자를 증대함으로써 성장 및 고용효과를 감소시킨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러 연구들은, 해외자본의 국내투자란 단기적인 투기자본의 성격이 지배적이고, 산업부문에의 투자규모와 효과는 실제로 미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또한 노동시장유연화가 낮을 경우, 그것은 기업의 노동비용을 증대시켜 기업이윤에 큰 압력을 가하게 됨으로 기업은 임금압박을 피해 임금이 낮은 개발도상국으로 국내기업을 진출하려 함으로써 국내의 고용효과를 감소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른지 모른다.


그러나 국내 노동시장을 더 유연화하고 임금비용을 더 낮춰야 해외로부터의 투자유인을 늘리고 한국자본의 해외투자를 줄일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현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2003년 기준으로 전체 해외직접투자의 72%를 넘는 중국에 대한 직접투자의 경우를 볼 때, 제조업분야의 중소기업이 주축임을 본다(중소기업 64%/ 대기업 29%). 중소기업의 해외투자가 급상승하기 시작한 2001년 이래의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화 정도를 고려할 때, 유연화가 덜 된 것의 밀어내는 요인 때문에 중소기업의 해외투자의 급증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까? 제조업부문 중소기업의 기술수준, 대기업에 의한 수직계열화가 가져오는 수익성 압박 등의 요인과 무관하게 노동시장 유연화만으로 중소기업의 국내투자 유인을 얼마나 늘릴 수 있을까? 설령 노동시장을 더 유연화시키고 임금비용 축소를 통해 중소기업의 해외직접투자를 국내로 돌린다 해도 그것이 국내의 고용증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러나 노동시장 유연화가 투자유인, 고용창출에 대해서 갖는 인과적 효과를 따지기 이전에, 과연 한국의 노동시장이 지금보다 얼마나 더 유연화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더 절박하고 더 구체적 현실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민주정부의 지도자와 정책 결정자들이 '노동 죽이기'에 누구보다 앞장서


한국이 IMF위기 이후 엄청난 경제적 곤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2004년 기준 GDP 세계 10위, 교역량 세계 12위의 OECD 가맹국가라는 사실과 대비하여, 한국의 노동자들이 민주주의하에서 경제적 시민권을 포함하여 보편적 시민권을 여전히 부여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한국민주주의의 커다란 치부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민주화는, 핵심적인 생산자 집단으로서의 조직노동자를 평등한 사회성원으로 그리고 노사관계에서 기업의 정당한 파트너로서 인정하는, 이른바 사회통합적 의식혁명을 갖지 못했다. NL적 문제의식과는 달리, PD적 문제의식은 현실 속으로 투입되지 못한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냉전반공주의와 권위주의적 산업화의 성장이데올로기가 중첩되면서 완강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구축한 결과물임에 분명하다.그러므로 한국사회는 노동관련 의식에 관한 한은 철저하게 계급적이다. 한국사회의 상류층과 중산층, 나아가 한국인 일반이 노동에 대해 갖는 인식은 분명 계급적으로 차별적이다. 민주정부의 지도자들과 노동정책의 결정자들이 노동과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인식 역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에 기반한 것이다.


현 정부가 비정규직 입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정규직노조에 대한 인식이 그러하다.


정규직은 고용보장, 높은 임금, 높은 사내복지, 노조의 보호를 받는, 일종의 노동귀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나친 혜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이 혜택을 그렇지 못한 비정규직과 나누어 갖는 도덕성을 실천해야 한다. 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과 혜택은 비정규직과의 분배로 사실상 하향조정되는 동안, 기업의 노동비의 부담은 결과적으로 증대하는 것이 되어서는 좋지 않다. 노동자들의 운동은 모름지기 자신의 특수이익을 추구하기보다 도덕적 운동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도덕적이라는 의미 속에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혜택은 사회적 통념의 기준에서 지나치게 높아서는 안 되고, 그들보다 못한 처지의 노동자들의 차별을 생각해 서로 공유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공익, 또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여기에서 공익이란 노동자의 역할은 묵묵히 기업의 이윤 창출에 봉사하고, 그것이 모아져 국민경제의 성장으로 이어져야 하고, 여기에 장애가 될 만큼 높은 임금이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이익표출과 요구는 파업이나 농성과 같은 집단행동으로 나타나거나 더욱이 폭력적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어떤 다른 집단보다도 법의 지배에 따라야한다. 대체로 노동귀족이니 노-노대결 이니 하는 담론은 대체로 이런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의 오늘의 현실에서 이러한 지배적 담론과 시각으로 노동문제를 보는 것이, 꼭 보수적인 관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과거 그들이 민중의 편에 있었고,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오늘의 민주정부의 지도부와 노동정책의 결정자들이 그러한 지배적 담론을 스스로 실천하고, 정책으로 만드는데 누구보다 과격하게 열성적이라는 사실이다. 노동에 관한 이러한 이해에 대하여 우리는 많은 질문을 갖게 된다.


1970년대 필자는 미국의 시카고에서 산 경험이 있다. 시카고 남부의 인디아나 개리시(市)의 US철강회사의 철강노조원들의 월평균 임금은 시카고에 소재하는 대학들의 교수들이나, 중고등학교 교사들의 평균임금보다 높았다. 또한 그것은 미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 IMF-JC 소속 기타큐슈의 신일본제철 철강노조원들의 임금은 웬만한 대기업사원들 보다 낮지 않으며, 임원들 봉급에 비해서도 큰 차이가 없다. 독일 IG Metall 노조원의 경우도 일본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는 물을지 모른다. 한국의 현대자동차나 기아자동차의 정규직 노조원들의 임금은 왜 높으면 안 되는가? 회사가 이들의 자녀들에 대해 대학까지 학비를 지원하고, 이들의 가족이 의료보험혜택을 받을 때, 그것을 왜 특혜라고 생각하는가? 이들의 임금수준과 회사복지가 중산층의 범주에 들어갈 대졸사원이나 임원진 또는 대학교수들의 그것과 비교되지 않고, 왜 비정규직 노동자나 중소기업의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그것에 비교돼야 하나? 정규직노동자들이 중산층으로 상승이동을 하면 잘못된 것인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를 왜 정규직 노동자들이 책임져야하나? 그것은 국가와 기업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기업의 오너, CEO, 경영진, 정부의 공직자, 중산층, 대학교수, 교사 등, 다른 집단이나 계층에 비해 노동운동은 왜 특별히 도덕적이어야 하나? 그들이 특수이익을 추구하는 것만 왜 특별히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하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혹은 선진국의 노조원들이 향유하는 경제적 시민권을 요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리 과격한 기준일까?


나아가 민주정부의 노동정책이 시장과 사회공동체의 가치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인가 혹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인가? 정부의 정책이 총량적 경제성장만을 지향하기보다 평균적 공동체성원의 경제적 조건이 개선되는 것을 동반하는 성장을 지향하는 것을 상상할 수는 없을까?


노동운동의 과제


필자는 민주주의하에서 국가-자본-노동의 관계를 정립함에 있어, 그것이 과거 권위주의 산업화 시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 환경하에서도 노동을 배제하는 동일한 구조를 재생산하는 것의 일차적인 책임이 민주정부에 있음을 보았다.


재벌대기업 노조를 비판하기 이전에, 오늘날 노동의 위기로 나타나는 현상은 먼저 민주주의, 민주정부, 국가의 역할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노조, 노동운동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필자가 강조하는 초점은, 도덕적인 접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으로서는 오늘의 노동문제를 이해하고, 풀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다음과 같은 주요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매우 비관적이라는 것이다.


① 노조는 "집합행위의 문제" (collective action problem)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자유주의 독트린에 따른 노동시장유연화상황하에서 노동시장의 분화는, 이른바 정규직/비정규직 구분으로 나타나는 인사이더-아웃사이더 간의 경계를 더욱 첨예하게 만들었다. 이는 하나의 대표적인 구분에 불과하다. 또한 대기업-중소기업, 중소기업에서의 여성노동자, 외국인노동자 등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노동이익을 대변하는 하나의 조직 내에 이들의 이익이 어떻게 대표될 수 있나? 노조의 이념, 정책, 노조의 조직형태 등에서의 변화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② 조직기반과 조직형태. 노조의 중심적 조직기반은 재벌기업 대규모 사업장의 정규직이며, 따라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들을 중심으로 한다는 특성을 갖는다. 이들의 발전 궤적이 일본의 IMF-JC와 같은 회사협력적 노조의 성격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매우 크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와 병행하여 비정규직노조, 중소기업사업장, 여성노동자들로 조직기반을 확대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현재의 기업별노조와는 별도로, 이들을 지역별, 산별형태로 묶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구조적으로 제약되는 것은, 산업구조에 있어서 영세자영업의 규모가 다른 나라에 비해 극히 크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민주정부의 산업정책에 있어 산업구조를 전환하는 것의 우선순위는 매우 중요하며, 이는 또한 노동운동의 앞날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③ 이러한 구조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노동운동은 노사관계에 있어 법, 제도의 형태로 국가/정부의 역할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접근하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


프랑스 사례는 이에 대한 한 모델사례를 제공한다. 즉 노조조직률은 10%대로 한국보다 오히려 낮지만, 단체협약적용율은 90%에 이르러, 기업-노조간 선도적 단체교섭이 사실상 전체 미조직 사업장에도 적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선도적 단체교섭이 다른 사업장에도 확대,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나 정치적 협약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자료는 다음 테이블에서 발견된다. 이 표가 말하는 것은 조직률은 중요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국가/정부/정치의 역할이다.


④ 선거경쟁의 영역에서 노조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에서 이를 선출된 정부에 강제하기란 어렵다. 그러므로 조직노동운동은, 미조직사업장으로 조직을 확대하는 노력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어떻게 표를 조직할 것인가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노동운동의 제일의 전략/정책의 우선순위는 정치시장에서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양당이 팽팽한 표의 균형을 만들 것이라는 전망 때문에, 노동이익을 대변하는 0.5당의 존재는 선거결과 뿐 아니라 향후 정부정책의 향방에 중요한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⑤ 이는 두 가지 수준에서의 노동운동의 방향을 규정한다.


하나는 노동운동의 이념과 정책/전략은 최소강령적 노선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노동자들은 물론 광범한 중산층 부문을 포괄할 수 있는 온건현실주의 노선을 갖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제도적 틀 안에서 정치의 중요한 행위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 핵심내용은 노동이 조직노동운동만의, 고전적인 생산직 노동자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노동이 생계의 중심적 수단이 되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도록 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이 라인위에서 정당-노조간의 새로운 관계정립이 요구된다. 양(兩)조직은 상대적 자율성을 가져야하겠지만, 노조가 중산층도 수용할 수 있는 정책과 이념을 통하여 정당을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공동체적 시장경제를 향하여


1) 한국민주주의의 최대의 과제는 선출된 민주정부가 어떻게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수 있도록 하게 하는가, 이를 위해 어떻게 사회부문과 연결될 수 있도록 만드는가 하는 문제이다.


민주정부의 경험이 실질적 민주주의발전에 기여하지 못한 것은, 두 측면에서 인데 강력한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에 대응하는 현실적인 이념과 정책대안을 갖지 못했다는 점과, 이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적 세력화의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절차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다 하더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은 증폭되고, 그 사회적 기반이 오히려 약화되는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민주정부의 경험은, 그들이 스스로 헤게모니에 흡수, 통합되기를 선택한 결과, 선거 시의 지지와 열망의 투입은 선거후 다수정당과 집권정부가 된 이후 기존의 현상유지가 되풀이되는 사이클을 만들어냈다.물론 민주화가 완전히 무용했던 것은 아니다. NL적 문제의식은 온건한 민족공조를 실현하면서, 탈냉전과 평화의 가치를 공고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화이후 현재까지의 경험을 통하여 특정의 민주정부와 정책들이 민주주의적이고, 개혁적인 내용을 지녔을 때는 NL적 문제의식과 PD적 문제의식이 병행할 때에 한하였다.


양자(兩者)가 배척적이었을 때는 정책의 민주적 내용은 후퇴하거나, 심지어 반동적 면모를 드러냈다. 이것은 왜 필자가 실질적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서는 PD적 문제의식이 권력과 정책 속으로 투입되어 이 양자가 동시발전하는 것이 필수적인가를 말한 이유이다.


2) PD적 문제의식의 핵심은, 성장에 균형을 맞추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혁명적 이념으로서의 PD적 문제의식이 현실에서 整理-실현되는 것에 대해 말했다.


민주주의는 갈등하고, 경쟁하는 사회세력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그 정당성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에 기초하면서, 그것은 혁명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일방의 전일적 가치와 힘이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정치체제이다.


시장-효율성-경쟁을 중심원리요 가치로 삼는, 그럼으로써 인간의 노동의 가치가 발전의 한 수단, 성장을 위한 하나의 요소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공리주의적 원리에 대응하여, 공동체의 가치, 인간의 근원적 가치, 그리고 노동의 보편적 가치 등, 독립적인 가치를 증진함으로써 양자가 균형을 맞추면서 공존하는 것이다.


3) 그러나 공동체적 노동의 가치가 다만 이념과 가치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정책으로 구현되어야 하며, 이를 형성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세력의 발전을 필요로 한다.


정책의 수준에서 그것은, 노동계층을 포함하는 민중들에게 보편적인 경제적 시민권이 부여되는 것, 그리고 또한 상당한 산업구조의 변화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생산 및 고용체계를 발전시키는 일을 포함한다.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성장동력을 구축하는 것이 그 핵심이란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세력화의 수준에서는, 노동자와 그들의 운동이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사회적 힘의 균형추 내지 중심세력 중의 하나로 역할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4) 절차적 민주주의로부터 또는 그것을 기초로 실질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일이, 현재와 같은 선거경쟁과 대표의 체계를 통한 대의제 민주주의에 의해 가능할 수 있는가?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참여의 범위가 보다 확대되고, 이를 통해 민중적 힘의 인풋이 정치과정 내로 크고 넓게 가능할 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참여와 시민사회에서의 운동의 중요성을 말한다.


참여는 투표를 통한 선거에의 참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의 노동현장, 작업현상, 직업현장인 사회의 하위조직과 수준에서 성원들의 폭 넒은 참여를 말한다. 그리고 운동은, 제도가 갖는 본래적 보수성, 즉 경직화와 일상화, 민중적 힘을 제약하는 경향성 때문에 민중적 힘이 정치과정으로 투입되는 중요한 채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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